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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정대철 고문의 아내, 김덕신 여사

중앙일보 2012.05.12 00:13 종합 22면 지면보기
김덕신 여사를 만난 곳은 서울 봉원동 ‘정일형·이태영 기념관’. 그는 시부모 초상화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아들까지 3대째 국회의원이 된 것은 두 분이 베푼 덕 때문” 이라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시아버지 8선, 남편 5선, 아들 초선, 할머니 2선, 형부 3선, 한 명만 나와도 가문의 영광이라는 국회의원이 집안에 ‘넘친다’. 선수(選數)만 도합 19선이다. 이 대단한 ‘정치 가계도’의 주인공은 김덕신(69) 여사. 그는 고 정일형(1904~1982)·이태영(1914~1998) 박사의 며느리이자 정대철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아내이며, 지난 4월 총선에서 승리한 정호준(41) 당선자의 어머니다. 3대가 한 지역구(서울 중구)에서 내리 금배지를 달았다. 친정 쪽도 정치 가문이다. 할머니는 4, 6대 국회의원을 지낸 고 박현숙(1896~1980) 여사, 형부는 조순승(83) 전 의원이다. 이쯤 되면 ‘선거의 여왕’이란 별칭, 과장이 아니다. JTBC 전용우 앵커와 함께 9일 서울 봉원동 ‘정일형·이태영 기념관’에서 그를 만났다.

시아버지 8선 남편 5선 아들 초선 할머니 2선 형부 3선 …





인터뷰를 청할 때부터 속내가 있었다. 그는 선거를 숱하게 치르며 웬만한 정치인보다 탄탄한 당선 노하우를 터득했을 듯했다. 그 비결을 묻고 싶었다. 하지만 1시간이 넘는 만남에서 똑 떨어진 결론은 없었다. 대신 그는 이런 답을 내놨다. “선거는 종합예술이에요. 당사자만 잘나서 되는 게 아니라는 얘기죠. 홍보물의 디자인 하나, 문구 하나까지 완벽히 어울려야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요.”





“선거는 종합예술 … 후보 잘나서 되나”



1979년 가족 사진. 뒷줄은 김덕신 여사와 정대철 고문, 앞줄은 왼쪽부터 둘째 딸 혜준, 고 정일형 박사, 고 이태영 박사, 정호준 당선자.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언뜻 봐선 10년은 젊어 보였다. 쇼트커트에 회색 투피스를 입은 세련된 차림이었다. 외모보다 더 관심을 끄는 건 화법이었다. 지금껏 언론 인터뷰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 신기할 만큼 대화에 막힘이 없었다. 겸손을 유지했지만 하고 싶은 말은 적당히 녹여낼 줄 알았다. 과연 ‘정치가의 안주인이구나’ 싶었다. 특이한 건 음성. 호리호리한 체격에 비해 중간중간 힘을 주는 허스키한 저음이 귀를 자극했다. 이유가 있었다. 오래 선거를 치르면서 소리가 완전히 변한 탓. 원래 처녀 땐 하이톤의 고운 목소리였는데 점점 굵어졌다고 했다. “한때 성악 공부 하라는 소리도 들었는데 참…. 그래도 유권자들이 그러대요. 제 목소리는 한 번 들으면 절대 안 잊어버린다고.”



●선거가 끝난 지 한 달이 지났네요.



 “지금까지 유권자께 감사한 마음뿐이죠. 솔직히 이번 선거가 제가 치른 많은 선거 중 가장 어려웠어요. 일단 상대가 만만치 않은 중진(정진석·고 정석모 전 내무부 장관 아들)인 데다 여론조사도 엎치락뒤치락했죠. 또 본선에 들어가기 전부터 지쳤다고나 할까요. 모바일 투표로 선거인단 모집하고 당에서 여론조사로 후보를 낸다고 했다가 다시 전략공천 지역으로 바뀌고, 이게 다 2주 새 벌어진 일이거든요. 이제 지나고 보니 그 어려운 시간을 기도의 힘으로 이겨냈구나 싶어요(김씨는 시댁과 친청 모두 5대째 기독교 집안이다). 50일간 새벽 기도를 다니면서 오전 12시까지는 물만 먹고 금식을 했죠.”



●체력적으로 힘들었을 텐데요.



 “제가 선거 때마다 하는 말이 있어요. ‘(선거) 운동기간은 짧고 인생은 길다’. 그만큼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얘기죠. 선거엔 2등이 소용없지 않나요. 선거 기간 내내 너무 추웠어요. 그래도 오전 4시쯤 일어나 새벽 기도 갔다가 꼭 선거사무실에 들렀어요. 24시간 사람이 드나드니 그때가 아니면 청소를 못 하죠. 싹 해치워놓고 집에 오면 7시쯤 되는데 채비하고 바로 나갔어요. 시장·목욕탕·지하철역 곳곳을 찾아다니고 당원들을 격려해줬어요. 특히 이번 선거에선 정말 온 가족이 똘똘 뭉쳐 뛰었죠.”



●그래도 남다른 선거운동 비법이 있을 것 같은데요.



 “총선 때 남편은 전화통을 붙잡고 유권자에게 ‘아들을 뽑아달라’며 연신 호소했어요. 그걸 보던 다른 이들이 얼마나 답답하면 저러겠나 놀랐죠. 저도 명함을 줄 때마다 이렇게 말했어요. ‘제가 정호준이 엄마예요’라고요. 엄마라는 말에 사람들이 명함을 다시 보더라고요. 저희의 간절함이 전해진 게 아닐까 싶어요.”



 그는 ‘아버지 정대철’의 에피소드로 얘기를 이어갔다. 총선 당일, 정호준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자 사무실은 흥분의 도가니가 됐다. 사람들과 축배를 들고 집에 와 잠자리에 든 건 새벽 시각. 그런데 정대철 고문이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눈을 번쩍 뜨며 일어났다. “어이쿠 큰일났어. 너무 늦게 일어났어.” 그러더니 바로 ‘아, 당선됐구나’라면서 혼잣말을 하며 웃었다. 남편은 선거 기간 내내 여론조사 수치가 소수점 이하만 올라도 너무 기뻐 잠을 못 잘 정도였다고 했다.



●아드님이 처음 출사표를 던졌을 때 정 고문은 반대하지 않았나요.



 “네. 맞아요. 2004년 남편이 수감(그는 당시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됐을 때 아들이 출마를 결심했죠. 저희가 2남1녀인데 원래 정치에 관심 있었던 건 막내 아들이였어요. 오히려 장남 호준이는 어릴 때부터 정치엔 관심 없다고 줄곧 말해 왔죠. 한데 아버지가 그렇게 되니까 어느 날 결심을 하데요. 남편이 오히려 ‘중구가 서울 중심인데 쉽게 기회가 오겠느냐’며 말렸죠. 그런 와중에 국회의원 두 분이 찾아왔어요. 아들이 불출마하도록 설득하려 온 건데 제 마음에 큰 상처를 줬죠. 그때 전 어떤 경우에도 출마를 시키겠다고 마음을 굳혔죠.”



●솔직히 남편과 아들, 누구 선거 때 더 가슴을 졸였나요.



 “물론 자식 선거가 더 초조했죠. 부모로서 당연하지 않을까요. 당선되고 정말 남편 때와는 다르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어요. 아들한테 문자를 보냈죠. ‘정말 이 은혜를 잊어버리지 마라.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모두 겸손이다’라고요.”



유학 생활부터 시작된 내조



 그는 ‘내조의 여왕’이기도 하다. 정 고문과 1969년 결혼한 뒤 줄곧 남편 뒷바라지를 해왔다. 72년 미국 미주리로 유학 간 남편의 학비를 대신 벌었다. 돌이 막 지난 장남을 데리고 함께 미국에 가 세탁소,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이후 남편의 선거운동을 돕는 것은 평범한 내조에 불과했다. 여당 의원으로서 두 차례 옥고를 치를 때 매일 면회를 간 일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정 고문은 2004년 외에도 한 번 더 옥살이를 했다. 1998년 제주도 여미지 식물원 수의 계약 등을 서울시에 부탁해주는 조건으로 경성그룹으로부터 4000만원을 받은 혐의였다). 하지만 지금껏 ‘고맙다’ ‘미안하다’는 살가운 말 한마디 듣지 못했다. 그래도 섭섭하기보다 그저 ‘할 일’이라는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정 고문과 어떻게 만났나요.



 “(조금 망설이다가) 대학교 1학년 때인데 남편이 제가 친구랑 광화문 지나가는 걸 우연히 봤대요. 그 친구가 당시 시댁 옆집에 살았거든요. 지금의 김원길 전 의원 부인이죠. 그 동창한테 가서 앨범을 보여달라고 했대요. 아무튼 친구가 저를 속이고 같이 영화 보자고 했어요. 가벼운 맘으로 나갔더니 남자가 있었던 거죠. 영화를 보는 내내 기분이 안 좋았어요. 그래도 소개한 친구가 곤란해하니까 한두 번 더 만났죠.”



●첫인상이 별로였어요?



 “너무 당황해 잘 몰랐지만 저를 만날 때 까만 고무신을 신고 나왔더라고요. 그게 참 인상적이었죠. 그런데 인연이었나 봐요. 처음 만나고 나서 전화가 와도 안 받았는데 할머니가 바꿔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사귀게 됐죠.”



●정치인으로서 정대철을 평한다면요.



 “그냥 정치인으로서라면 아마 점수를 높게 줄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 저보고 그래요. 살면서 가슴이 쿵 내려앉을 때가 얼마나 많았냐고. 남편이 할 말 다하는 사람이니 가족으로서 힘들었겠다는 얘기죠. 하지만 그 점을 가장 높이 사요. 남편 칭찬 좀 하자면요, 4대 독자인데도 참 사람을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 때가 묻지 않은 사람이고 굉장히 순진하죠. 그래서 옥고도 치른 게 아닌가 싶죠.”



●아내로서 수감 때가 가장 힘들었나요.



 “왜 하늘이 남편을 그렇게 만드나 원망했죠. 그런데 이제는 그 뜻을 알겠어요. 독방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기회였어요. 성경 읽고 기도하는 시간이요. 남편은 벽에다가 30명의 이름을 적어놓고 하루 세 번씩 번갈아 그들을 위해 기도했대요. 지금도 남편이 가장 공을 들이는 일이 구치소 선교죠.”



●남편이 미웠을 땐 없나요.



 “그 얘길 다하려면 밤을 새워야죠. 유학할 때 당시 미주리 대학에는 먼저 신문학 학위를 따신 장원호 박사가 계셨죠. 두 가족이 다 가난했어요. 그런데 어쩌다 아는 분이 돈을 좀 빌려줄 테니 같이 세탁소를 해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낡은 기계 놓고 문을 열었죠. 일감은 주로 아기 기저귀였고요. 그때 세제가 너무 독해서 열 손가락에 주부습진이 다 생겼어요. 한국에 돌아와 15년이 지나도 낫지 않더라고요. 당시 장 박사님네 아이가 네 살, 우리 호준이가 두 살이었는데 그 좁은 세탁소에서 둘이 뛰놀고 그랬어요. 에휴, 지금 생각하면…. 1년 만에 관두고 나머지 4년은 도서관 사서로 돈을 벌었어요.”



 ‘유학 내조’는 집안에서도 벌어졌다. 남편은 집으로 사람을 수시로 불러들였다. 12평밖에 안 되는 유학생 아파트에 주말마다 유학생이며 강사까지, 한국 사람들을 초대했다. 그때마다 한 상을 차려내야 했다. “웬만한 남자 같으면 쓰레기통이라도 비워주고 나갔을 텐데 2차 간다며 그냥 사라질 때가 많았죠.” 남편은 반찬도 퍼주기 일쑤였다. 비싼 배추를 힘겹게 절여 김치를 만들면 김씨가 일 나간 사이 유학생들을 다 먹이고 빈 통으로 만들어놨다. 처음엔 화가 났지만 천성이 남 대접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생활 5년 내내 제 눈은 (잠이 부족해) 늘 토끼 눈처럼 빨갰어요.”



●그래도 5선 의원 부인이라면 부러운 게 많죠.



 “남들은 온실 속 화초라고 하지만 절대 아니죠. 우리 시누이들은 남편이 변호사·사업가니까 참 잘살아요. 우리는 보따리를 풀었다 놨다, 내 집 마련까지 이사를 12번 했어요. 그때 이사 도와주던 당원 분이 그러대요. 이 짐 다 갖다 버리고 1000만원만 있으면 예쁘게 다 바꾸겠다고.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그 돈 있으면 제가 집을 사고 싶네요’라고요. 마흔다섯에 처음 집을 마련했어요.”



쟁쟁한 시댁



 시댁도 보통 시댁이 아니었다. 시아버지인 고 정일형 박사는 정치인 중에서도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일제하에서 연희전문학교·숭실전문학교 등에서 교수 및 학장을 하다 신사참배 반대 등 반일사상의 선도자라는 죄목으로 5년간 수감되기도 했다. 해방 뒤엔 외무 관료를 거쳐 야당의 거목이 됐다. 1950년 5월 서울 중구에서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9대 국회까지 8선의 의정생활을 했다. 시어머니였던 이태영 박사도 한국 현대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울대 법대생, 여성 첫 사법시험 합격자,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등 법조계에서는 ‘여성’이란 타이틀로 모두 첫 테이프를 끊었다. 특히 여성 인권 보호를 위해 노력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정도면 며느리로서 부담이 없을 수 없을 터다. 하지만 그는 의외의 답을 했다. ‘너무나 익숙한 집안 분위기’라는 것이다.



●쟁쟁한 시댁이라 시집와서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아뇨. 그렇지 않았어요. 잠깐 저희 집안을 설명할게요. 저희 할머니께서도 4, 6대 국회의원을 지내셨죠. 할아버지가 동아일보 평양지국장을 하시다가 고문으로 몸져누우셨죠. 그래서 할아버지 몫까지 할머니가 사회활동을 하게 되신 거예요. 저는 특히 할머니와 참 각별한 사이였어요. 어머니가 제가 세 살 때 여동생을 낳다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할머니가 엄마 역할을 대신해주셨죠. 언니랑 오빠는 제가 어릴 때 집 떠나 유학 가 있었고 제가 집에서 모든 심부름을 했어요. 엄한 할머니 훈육을 그대로 따랐죠. 그래서 아마도 시집와서도 그렇게 어렵다고 느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또 시댁과 친정 모두 이북 출신인 데다 기독교인 것까지 공통점이 많았어요.”



●할머니가 정치를 하셨으니 더 그랬겠죠.



 “지금껏 선거를 치르면서 그 생각을 했어요. 중학교 때 저희 할머니 선거 구호가 쓰인 누런 갱지를 들고 다녔던 기억이 나요. 그게 제 선거운동의 시작이었던 거죠. 아침에 눈뜨면 강원도 지역구민들이 일찍 와 당황했던 기억도 있고요.”



●시어머니가 너무 대단한 게 좋기만 했을까요.



 “저희 시아버님이 시어머님을 두고 별명을 지으셨어요. ‘황소 같은 여자’라고요. 하루 4시간 이상은 절대 주무시지 않았을 정도로 체력이 대단하셨죠. 법조인, 사회운동가이기 전에 아내로서 역할에 충실하셨죠. 음식이면 음식, 바느질이면 바느질 흠이 없었죠. 일제 치하에서 시아버님 옥바라지하시면서도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밤새 누비 이불을 만들어 파셨어요. 이 집(정일형·이태영 기념사업관)도 어머님이 손수 짓고 나무 심고 돌 가져다 꾸미신 거죠. 늘 얼마나 깔끔하셨는지….”



●가장 기억나는 모습은요.



 “돌아가시기 전 치매에 걸리셨어요. 그래도 늘 정리정돈을 하셨죠. 점점 식구들을 못 알아보셨지만 아들만은 알아보셨죠. 늘 뭘 먹이지 못해 난리였고요. 정말 그때 모성이라는 게 뭔지 가슴 저리게 느꼈죠. 그리고 늘 주무실 때도 기도하는 모습으로 엎드려 잠드셨어요. 참, 한창 활동하실 땐 저명인사들이 가정문제, 이혼상담을 하러 개인적으로 집에 올 때도 있었죠. 새벽까지 그분들 얘기를 들어주셨어요. 그러곤 늘 하시던 말씀이 ‘남편이 죽은 줄 알고 그냥 살라’ 그러셨죠.”



 그는 평생 ‘정치가문의 안주인’을 했지만 늘 아내·며느리·어머니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YWCA 이사로 활동하며 북한 어린이 돕기에 나섰고, 늦깎이 공부도 했다.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예순 나이에 연세대 신학대학원을 다녔다. 그는 “최고령자여서 졸업장을 연단에 나가 받았다”며 자랑스러워하면서 “뒤늦게 젊은 애들 쫓아가려니 공부가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가족이 모두 정치인인데 직접 출마할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제가 제 능력을 잘 알죠. 저는 그냥 남을 돕는 정도가 어울려요. 탈북자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모아 보따리 보따리 쌓아놓는다거나 남편과 함께 교도소에 책을 보내는 정도죠.”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도 있는데요.



 “그건 잘못된 평가죠. 제가 뭘 했나요. 시부모님들이 항상 정의 편에서 올바르게 사셨던 덕을 우리가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들 당선도 국립묘지에 계신 시부모님이 가장 기뻐하실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치며 농반진반으로 물었다. ‘이제 손자들도 국회의원이 되지 않겠느냐’고. 그는 대답 대신 웃으며 에피소드를 전했다. “이번 총선 때 미국에서 사는 외손자가 왔어요. 아침마다 할아버지가 사람들에게 명함 나눠주는 걸 봤죠.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아이 주머니에 삼촌 명함이 가득한 거예요. 딸이 그걸 보고 웃으며 그러더라고요. ‘난 우리 아들을 위해 또 운동할지도 모르겠다’고. 친손자도 외할머니한테 그러더래요. 자기도 (민주당 운동원이 입는) 노란색 점퍼가 필요하다고요. 뒤에 2자가 쓰여 있어야 한다고. 아마도 남편이나 아들처럼 ‘보고 자란 것 때문에 하게 되는구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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