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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오래돼서 새로운 … 헌책방 돌아오다

중앙일보 2012.05.12 00:00 종합 34면 지면보기
헌책방이 화려하게 돌아왔다. 떨어져 나간 책장에 먼지가 날리는 책으로 가득한 헌책방은 이제 잊어도 좋다. 화사하고 편하게 꾸민 책의 잔치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얄팍해진 지갑도 중고책에 선뜻 손을 내미는 이유다. 올 초 문을 연 중고책 서점인 알라딘 서울 신촌점 내부. 하루 2000~3000여 권의 책이 들락거리며 새 주인과 만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성공을 꿈꾸던 누군가는 낡은 법전을 사야 했고, …(중략)… 가난한 문학청년은 이 빠진 세계문학전집을 한 권 한 권 해치웠고, 내 아이가 영재일 것이라 굳세게 믿었던 젊은 엄마들은 덤핑 처리된 아동문학전집을 노끈에 묶어 버스에 올랐다.”(백창화·김병록의 『유럽의 아날로그 책 공간』에서)



 오랜 기억 속 헌책방은 이런 모습이었다. 삶이 윤택해지고 책이 흔해지면서 우리 삶에서 헌책은 점점 멀어져 갔다. 팍팍해진 살림살이와 얇아진 지갑 탓일까. 중고책이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중고책을 취급하는 오프라인 매장과 온라인 서점에서 모두 중고책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먼지를 뒤집어 쓴 낡은 책이란 편견과 헌책이라는 거부감을 털어 내고 중고책을 중심으로 한 또다른 독서 트렌드가 생겨나는 것이다.



알라딘 중고책 서점에서는 고객에게 직접 책을 사고, 이 책을 다른 고객에게 판다. 서점에 막 들어온 ‘따끈따끈한 신상(?)’ 책을 소개하는 코너.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마니아 만의 취미는 아니다=소설가 장정일은 그의 독서 기록을 담은 책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마티)에서 “헌책방은 일반서점에서는 보지 못하는 책을 보게 하고, 손에 쥐게 만든다. 자꾸 헌책방을 찾게 되는 까닭이다”라고 말했다.



 장정일의 표현대로 헌책방은 희귀본이나 품절 도서를 찾는 마니아층의 전유물 같았다. 하지만 최근의 분위기는 좀 다르다. 일반 독자들이 보다 저렴한 값에 읽고 싶은 책을 사는 형태로 바뀐 것이다. 인터넷이란 소통수단과 중고책 열기가 한몫을 했다.



 이런 변화를 이끈 대표 주자는 온라인 서점 알라딘이다. 2008년 인터넷 중고책 사업을 시작한 알라딘은 아예 오프라인 중고책 서점을 차렸다. 지난해 4월 서울 종로점을 필두로 올 초에는 신촌점을, 지난달에는 경기도 분당에 매장을 냈다.



 알라딘 홍보팀 조선아씨는 “헌책이라는 생각에 책 상태를 확인한 뒤 구매 결정을 하는 독자들이 많아 오프라인 매장을 열게 됐다”며 “오프라인 매장을 연 뒤 판매량이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35%나 늘었다”고 말했다.



 오프라인 매장 중 규모가 가장 큰 종로점은 6만여 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다. 하루에 들고 나는 책만 3000여 권에 이른다.



 중고책의 가장 큰 매력 요인은 가격이다. 독자에게서 중고책을 직접 사는 알라딘은 출간연도나 판매량과 재고 규모, 책 상태 등을 기준으로 매입가 산정 프로그램을 활용해 가격을 정한다. 서오현 알라딘 종로점장은 “다 본 책을 판매한 돈으로 신간을 다시 사는 등 중고책 시장이 독서 인구를 늘리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중고책 서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분야는 어린이 책이다. 주말이면 가족 단위 고객이 몰리며 어린이책의 몸값이 높아진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고객의 러브콜이 몰리는 인기 그림책을 뽑아 놓은 코너.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중고책의 강세는 온라인 서점에서도 감지된다. 인터넷에서 중고도서 사업을 하는 교보문고의 경우 올 1분기 중고장터의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33%, 방문자수는 18%나 늘어났다. 또 인터파크도서에 따르면 올 3월까지 최근 3년간 380만 권의 중고책이 팔렸고, 최근 6개월간의 중고책 주문량은 서비스를 처음 시작했던 2009년 당시와 비교해 238% 급증했다.



 2010년부터 오픈마켓 형태의 중고서점을 운영하는 인터넷 서점 예스24도 마찬가지다. 올 1분기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70%나 늘었다. 예스24 프로덕트마케팅팀 윤미화씨는 “중고책이라고 해도 거의 새 것 같은 상품도 많다”며 “중고책에 대한 거부감도 많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짧아진 책 순환 주기=중고책 시장이 커지는 것은 국내 출판 시장의 흐름과도 관련이 있다. 2011년 『한국출판연감』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국내에 등록된 출판사는 3만5626개에 이른다. 한 해에 새로 나오는 책의 종류는 4만여 종이 넘고, 발행부수는 1억630만 권에 달했다. 반면 같은 기간 국내 성인 1명의 연간 독서량은 10.8권에 그쳤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책은 쏟아져 나오지만 독서 인구는 감소하고, 동네 서점 등 유통망이 줄어들면서 시장에서 제대로 발도 붙이지 못한 채 사라지는 책은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베스트셀러 주기가 짧아지고 자기계발서 등 트렌드 책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며 독자 입장에서는 오래 소장할만한 책이 많지 않다는 것도 중고책 시장이 커지는 이유다.



 알라딘 중고책 판매 통계를 살펴보면 이런 점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어린이(22.2%)와 유아(4.9%) 책의 비중이 27.1%에 이른다. 소설 등 문학(15.3%)과 경제·경영(8.2%), 인문(8.2%) 관련 서적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다른 분야에 비해 오래 두고 보는 경향이 강한 인문책의 경우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다고 알라딘 관계자는 말했다. <그래픽 참조>



 인터파크도서의 경우 가장 있는 장르는 중고전집(19.9%)이 1위였고, 아동도서(17.6%)와 초중고생 학습서(16.4%), 소설(12.7%)의 순으로 조사됐다. 인터파크 INT 홍보팀 남창임 차장은 “가격 부담이 커서 망설이게 되는 아동전집이나 꼭 읽어야 할 아동도서를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중고책을 통해 구매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헌책방의 귀환’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출판 시장이 어려운 상황에서 출판사들이 저가의 책을 찍어낸 뒤 중고책 유통업체를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등 출판의 질적 저하를 가져올 수도 있다. 출판 유통 질서를 혼란하게 할 위험도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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