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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오십의 간송, 추사 그림에서 자신을 발견했나

중앙일보 2012.05.07 00:33 종합 27면 지면보기
간송 전형필이 따라 그린 ‘방고사소요’ 전형필은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에게 그림을 배웠고, 당대 최고의 서화 감식안 오세창과 교류했다. 추사 김정희의 ‘고사소요(高士逍遙)’를 따라 그린 이 작품(50.7×31.8㎝)에 대해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은 “넓은 종이 위에 옮겨 그리면서 커진 바위 위가 허전해 풀을 치는 등 그림답게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1956년, 50세의 간송(澗松) 전형필(1906∼62)은 옆에 있던 해진 갱지를 무심히 집었다. 갖고 있던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고사소요(高士逍遙·뜻 높은 선비가 거닐다)’를 그대로 따라 그렸다. 추사의 제주도 유배 시절 그림이다. 나무의 묘사나 바싹 마른 먹선이 ‘세한도(歲寒圖·1844)’와 비슷한 시기의 것, 즉 환갑을 앞둔 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선비가 숲 속을 거닐되 좁은 화폭 탓인지 나무들이 감옥의 창살인 양 갇혀 있는 느낌이다.

간송미술관 진경시대 회화대전



 간송의 ‘방고사소요(倣高士逍遙)’는 좀더 너른 공간으로 선비를 해방시켰다. 갱지에 그려 먹이 잘 먹어들지 않아 오히려 선이 부드러워졌다. 산책하는 뒷모습이 우리 문화재 사이에서 유유자적했던 자화상 같기도 하다.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70) 연구실장은 “간송은 그렇게 부자였다 하나 자기 것 쓰는 데는 인색해 갱지에 그렸다. 누구든 잘 나갈 때는 이런 주제의 그림 안 나온다. 추사는 유배중이었고, 간송은 보성학교 운영 문제로 근심이 많을 때였다”고 설명했다. 6년 뒤 간송은 급성 신우염으로 타계했다.



 간송은 10만석 부호가의 상속권자였다. 스물 셋, 대학 3학년 때 일이었다. 그 재산으로 그는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유출되는 것을 막았다. 그가 문화재를 집중적으로 수장하던 1930∼40년대는 일제의 수탈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다. 당시 고려 고분 2000여 기가 도굴되고, 고려청자 1000여 점이 일본으로 밀반출됐다 한다. 간송은 3·1 만세운동의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위창(葦滄) 오세창(1864~1953)을 멘토로 삼아 문화재를 수집했다. 위창은 당대 최고의 감식안이었다. 휘문고보 시절 미술선생이었던 춘곡(春谷) 고희동(1886~1965), 사촌형이기도 했던 역사소설가 월탄(月灘) 박종화(1901~81) 등과도 교류했다. 이렇게 모은 것이 ‘청자상감운학매병’(국보 68호)·‘혜원전신첩’(국보 135호) 등 12점의 국보와 10점의 보물 등 다수의 문화재다.



추사 김정희의 ‘고사소요’(29.7×24.9㎝). [사진 간송미술관]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을 손에 넣던 이야기가 유명하다. 간송은 존재 사실만 알려져 있던 훈민정음 해례본이 경북 안동에서 나왔는데 당시 돈으로 1000원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서울의 기와집 한 채 값으로, 고서 가격치곤 심했다. 그러나 소개한 이에게 사례로 1000원, 해례본 값으로 1만원을 쳐 주며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런 연유로 좋은 문화재가 나오면 상인들은 간송에게 제일 먼저 보였다 한다. 1940년엔 재정난에 허덕이는 보성고보를 인수했다. 서거한 해에 대한민국문화포장이, 2년 뒤 대한민국문화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일제강점기, 6·25 등 근대사의 격동기에 모으기도 지키기도 쉽지 않았을 터. 이제는 유지하는 것도 큰 일이다. 간송미술관의 2대들은 70대 고령이다. 어느덧 3대는 어찌할 건가 하는 문제가 미술관 밖에서도 거론된다. 봄·가을 정기전엔 수 만 인파가 모여 눈호사를 누리는 한편, 낡고 좁은 시설을 안타까워한다. 간송 타계 후 상명대 미대 교수였던 삼남 영우(72)씨가 가업을 이었다. 전영우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은 간송 30주기 때 이런 글을 썼다. “모두들 환한 얼굴로 간송의 높은 뜻을 기리며 웃고 있는데, 나만은 20년 동안 애태운 것이 그만 병이 되어, 30년 전의 그분처럼 아픈 가슴을 틀어쥐고 앉지고 눕지도 못한 채 혼자서 또 이 밤을 지새운다.”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간송 50주기 기념 진경시대 회화대전’을 연다. ‘돌 사이를 졸졸 흐르는 작은 시내 곁에 난 소나무’(澗松)라는 자호(自號)를 쓰던 그가 간 지 벌써 반세기다. 간송은 우리 문화의 전성기라 할 조선 후기 진경시대 150년간의 회화를 집중적으로 모았다. 진경산수화를 정립한 겸재(謙齋) 정선(1676~1759)의 ‘풍악내산총람(楓岳內山總覽)’, 이에 반해 조선남종화를 일군 현재(玄齋) 심사정(1707~69)의 ‘계산모정(溪山茅亭)’, 그리고 단원(檀園) 김홍도(1745~?)와 혜원(蕙園) 신윤복(1758~?)의 진경 풍속화 등 우리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회화 100여점이 전시된다. ‘방고사소요’와 월탄과 술 마시다 흥에 겨워 그린 국화 그림 등 간송의 솜씨를 짐작할 수 있는 서화도 함께 걸린다. 13∼2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 02-762-0442.



◆간송미술관=일제강점기 간송 전형필이 사재를 털어 수집한 문화재를 수장·연구·전시해 온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 1971년부터 봄·가을 정기전을 열어 국보급 유물을 주제별로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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