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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68) 류샤오치

중앙일보 2012.05.07 00:32


▲버마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를 참관하는 류샤오치와 왕광메이. 1963년 4월부터 5월까지 류샤오치는 왕광메이와 인도네시아, 버마(지금의 미얀마), 캄보디아, 베트남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3년 후 문혁이 발발하자 왕광메이는 이때 입었던 치파오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사진 김명호]

“나 죽으면 화장해 바다에 뿌려라, 오대양 돌며 세상 보게”



마오쩌둥과 류샤오치는 1922년 상하이에서 처음 만났다. “따톈샤(打天下)”, 천하를 놓고 싸울 때는 가깝기가 한몸과 같았지만, 쭤톈샤(坐天下), 천하에 군림하자 남은 건 결별이었다. 과정도 처절했다.



1967년 새해가 밝았다. 중난하이의 조반파들이 류샤오치의 집 담장에 “중국의 흐루쇼프를 타도하고 마오 주석을 보호하자”는 대자보를 내붙였다.



류샤오치는 군중 집회에 나가 소견을 밝히고 싶었다. 베이징 건축공업학원 홍위병 총부가 공개검토장에 나오라고 요구하자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보냈다. 며칠 전 류샤오치는 마오에게 “공부 열심히 하고, 행동 조심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1월 7일 4시 이전까지 출석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나가도 좋을지 주석의 지시대로 하겠다.”



마오는 류샤오치가 공개된 장소에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급히 총리 저우언라이를 불렀다. 1월 7일 새벽, 저우언라이는 건축공업학원 학생대표를 접견했다. 갑자기 불려온 학생들에게 “억지로 끌어낼 것 없다”며 행동을 제지시켰다.



일주일 후, 중앙문혁소조의 최말단 격인 치번위(戚本禹·척본우)가 중공 중앙판공청 사람들을 불러 눈알을 부라렸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 모두 중난하이에서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너희들은 도대체 뭐 하는 것들이냐.” 대충 이런 투였다.



그날 밤 중난하이의 조반파들이 류샤오치의 집에 들이닥쳤다. 처음에는 멈칫했지만 이럴 때일수록 숨은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꼭 있게 마련이다. 평소 얌전하던 청소부가 8가지 죄목을 열거하며 답변을 요구했다. 류샤오치의 멱살을 잡고 왕광메이의 머리채를 한차례 쥐고 흔들었다. 명색이 국가주석이었지만 신화가 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류샤오치는 옷걸이에 걸려있던 홍위병 완장도 압수당했다. 사연 있는 완장이었다. 1년 전 여름부터 가을까지 마오쩌둥은 8차례에 걸쳐 홍위병 1300만 명을 사열한 적이 있었다. 8월 18일 열린 첫 번째 사열 대상은 베이징의 조반파 100만 명이었다. 이날 마오쩌둥은 계란 4개와 찐빵 두 개, 잘 요리한 돼지고기 네 덩어리를 받아 든 홍위병들을 아침 7시 반부터 6시간 동안 천안문 성루에서 사열했다. 시작 무렵 홍위병 대장들이 마오에게 완장을 채워줬다. 린뱌오, 저우언라이, 천보다 등에게도 채워줬지만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한번 흘겨보고 그냥 지나쳤다.



그날 밤 덩샤오핑이 류샤오치의 집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한참 주변을 살피더니 “이거 없으면 큰일난다. 어렵게 구했다. 꼭 차고 다녀야 한다”며 주고 간 완장이었다.

1967년 3월 21일,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류샤오치와 왕광메이의 역사 문제에 관한 전담조’ 구성을 의결했다.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강청)과 중앙 문혁소조 고문 캉성(康生·강생), 공안부장 셰푸츠(謝富治·사부치)의 지휘를 받는 특별수사본부 같은 거였다. 방어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류샤오치는 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중난하이 조반파들은 류샤오치 부부에게 밥, 청소, 빨래를 직접 하라고 통보했다.



백화(百花)가 만발하자 전국의 언론기관들이 ‘중국의 흐루쇼프’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베이징의 신화서점이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사진과 책들을 쌓아놓고 소각하자 전국의 분점들도 뒤를 따랐다.



류샤오치는 죽음을 예감했던지 자녀들을 불러 유언 비슷한 말을 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엥겔스처럼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라. 5대양을 떠돌며 전 세계를 보고 싶다. 나는 평생을 무산계급으로 살았다. 너희들에게 남겨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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