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홍구 칼럼] 정치불신의 벽을 넘어서려면

중앙일보 2012.05.07 00:00 종합 39면 지면보기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우리는 지금 정치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른바 선진민주국가에서 후발독재체제에 이르기까지 지구촌 곳곳에서 정치와 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의 벽은 높아만 가고 있다. 21세기로 들어서면서 심각성이 한층 더해진 민주주의의 위기와 시장경제의 파탄이 수반한 자본주의의 위기가 겹치면서 국가운영의 책임을 지고 있는 정치인은 물론 정치 자체가 규탄과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한국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오히려 정치불신의 증세는 한층 심각해지고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자유롭고 공정한 다섯 번의 대통령선거와 일곱 번의 국회의원선거를 치러 왔지만 정치인과 정치에 대한 국민의 인식은 선거를 거듭하면 할수록 더 큰 실망과 불신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이를 어찌 설명할 것인가. 우선은 독립운동기에 비롯된 이데올로기 시대의 분열을 시작으로 남북분단, 6·25전쟁 등 60여 년에 걸친 체제대결을 겪으며 국민들이 쌓아온 다양한 경험들이 이념적 분열의 정치문화를 고착시킴으로써 대화와 타협을 통한 생산적 정치가 발붙일 자리를 찾지 못했는지 모른다. 한편 이 같은 정치실패의 원인이 개인이 아닌 체제의 한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권력구조의 개혁과 같은 시스템 개조보다는 단번에 만사를 해결해줄 수 있는 환상적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하는 전통적 정치문화도 민주정치의 침체 원인으로 작용했다.



 사실 선덕여왕이나 세종대왕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막연한 희망은 민주정치 시대에서는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국제정세와 역사의 방향을 꿰뚫어보는 비전, 매사에 공익(公益)을 앞세우는 도덕성과 품위, 그리고 국가경영의 전문성을 지닌 새 시대의 정치리더십을 만들어내는 것이 당면한 최대과제다. 6개월 전 국가파산이란 벼랑 끝에 몰렸던 이탈리아의 나폴리타노 대통령은 냉철한 국가운영의 전문가이며 항상 공익을 앞세우던 경제학자 마리오 몬티를 위기극복거국내각의 총리로 임명했다. 국내외에서 광범위한 신임을 받는 몬티 정부는 일단 경제위기로부터 탈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탈리아 국민의 54%가 몬티 정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이 여론조사에서 나타나고 있다. 같은 조사에서 정당들은 2%라는 웃지 못할 지지도를 기록했다. 이탈리아와 한국의 사정은 크게 다르지만 국가적 위기극복을 위한 몬티 총리 기용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권력과 책임을 한 사람에게 떠맡기는 한국의 대통령제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 여부는 차치하고 우선 12월 대통령선거로 향한 7개월 동안의 정치과정이 대결과 분열을 한층 심화시키는 이전투구로 전락한다면 한국 민주정치의 정통성과 가능성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여야, 이젠 정책경쟁에 나서라’(중앙SUNDAY 4월 29일자)는 강봉균 의원의 충고는 참으로 시의적절했다. 40여 년에 걸쳐 행정부와 입법부에서 국가에 봉사한 강 의원이 18대 국회를 마지막으로 떠나며 국가발전과 민생안정에 대한 미래희망과 이를 달성할 정책 대안을 갖고 12월 대선에 임하라는 간곡한 호소를 남긴 것은 정치권이 주목해야 마땅할 것이다. 만약 대선 승리만을 위해 여야가 이념·지역·세대·계층 간의 갈등만 증폭시키고 공동체의 화합을 이끌어낼 정책방안을, 특히 복지확대와 재정건전성, 그리고 경제민주화를 실현시킬 수 있는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한국 경제의 앞날은 더욱 불안해질 것이라는 그의 경고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민주정치에는 원초적 딜레마가 있다. 당선, 집권, 효율적 통치를 밑받침할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한 인기영합과 국가와 공동체의 안전과 미래를 위해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결단을 어떻게 양립시키느냐는 것이다. 이 딜레마를 풀어줄 손쉬운 묘안이 없기에 국민에게 희생을 호소하는 지도자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이 21세기 민주정치의 현주소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종종 국민이 갖고 있는 시민의식과 저력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잘못을 범하곤 한다. 많은 민주국가의 선거가 여론조사에 나타난 이념의 양극화보다는 넓고 안정된 중간이, 특히 실용적인 지혜를 소중히 여기는 중간이 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은 그들이 살아갈 건전한 사회를 설계하는 데 기성세대보다 훨씬 폭넓은 유연성과 창의력을 소지하고 있다. 오늘의 병든 정치와 경제를 치유하고 건강한 내일을 기약하면서 정치불신의 벽을 넘어서려면 쓴 약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시민과 젊은이의 양식을 믿고 대화하려는 정치인들의 수가 훨씬 늘어나야 할 것이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