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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란 성벽 너머, 비탈진 골목마다 송이송이 피어난 집

중앙일보 2012.05.01 00:23 종합 26면 지면보기
성곽에 면한 축대 위에서 바라본 서울 삼선동 장수마을의 모습. 멀리 서울의 동쪽 풍경이 보이고,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낙산공원으로 통하는 암문(暗門)을 마주하게 된다. 파노라마로 여러 장을 찍어 한데 이어 붙인 사진이다. [사진 구가도시건축]


능선을 따라 오르는 성곽엔 특징이 있다. 안쪽에선 그 높이가 만만하지만, 밖으로 나가면 절벽처럼 높아져 사람 키의 몇 배가 된다. 이렇게 안은 높고 밖이 낮아야 쳐들어오는 적을 막기 쉬울 것이다.

조정구의 서울 진(眞)풍경 ⑧ 삼선동 장수마을



 서울 동쪽 낙산을 올라온 성곽도 예외가 아니다. 공원 한 켠으로 숨은 암문(暗門)을 빠져나오면, 마치 다른 세상이 나타나듯 성 밖 서울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길들은 저절로 비탈진 땅을 흘러, 높다란 성벽을 떠나 집들 사이로 사라진다. 좁고 넓은 계단과 골목에, 작은 집들이 장난감 블록을 끼우듯 들어앉은 곳, 바로 ‘삼선동 장수마을’이다.



 지난 토요일 오랜만에 장수마을을 찾았다. 완연한 봄기운에 가지마다 오므라진 입들이 파릇파릇 펼쳐지고, 골목과 마당 그리고 지붕 위에 놓인 화분들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동네목수’가 만들었다는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동네목수는 시민활동가 박학룡씨가 주민들과 함께 설립한 마을기업이다. 길쭉한 마당을 끼고 놓인 ‘ㄱ’자 모양의 카페는 깔끔했다. 집을 만든 솜씨는 수수했지만, 돌보는 손길이 참 정갈했다. 2008년부터 대안개발연구모임에 참가해 ‘정든 이웃과 계속해서 살 수 있는 장수마을 가꾸기’를 진행한 일이 결실을 맺은 듯해 감회가 새로웠다.



 성곽과 삼선공원 사이의 비탈에 자리한 장수마을은, 6·25전후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이 움막이나 판잣집 등을 지으면서 형성됐다. 급한 경사에 저마다 다른 지형조건에서 길을 내고 축대를 세워 터를 만들고 집을 지었다. 처음에는 허술했던 집들이 1960~70년대를 거치며 양성화돼 지금 같은 모습이 됐다. 골목과 집들은 작은 포도송이처럼 여러 덩어리로 뭉쳐져 있다. 골짜기에 파고들어 골목을 둘러싸고 자리한 집, 성곽을 향해 경사를 지으며 길 양쪽으로 놓인 집, 그리고 위쪽까지 올라왔다 다시 내려가면서 막다른 골목에 네다섯씩 모여 있는 집을 볼 수 있었다. 흥미로운 건 서로 다니는 골목이 다르면, 수십 년을 한 동네에 살아도 옆에 누가 사는지 모르기도 한다는 점이다.



 카페에서 하루를 묵으며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봤다. 성곽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골목 중에는,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로 불뚝 솟은 바위가 나타난다. ‘뾰족바위’로 불리는 이 바위에서 30년 전만 해도 동네사람들이 산신제를 지내기도 했다. 커다란 배처럼 생긴 삼선공원도 흥미롭다. 비운의 역사를 떠오르게 하는 총무당(조선 말 군사기관. 원래 광화문 앞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이곳으로 옮겨졌다)을 가운데 두고, 성곽 아래 층층이 쌓인 집들을 배경으로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 놀았다. 이제는 장수마을 사이에 기다란 경사로가 놓여 다니기도 매우 편하다.



 이곳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여러 문제도 눈에 띄었다. 재개발을 이유로 기초적인 기반시설인 도시가스가 놓이지 않거나, 빈집들이 많아 방범과 안전이 걱정되기도 한다. 욕실이나 정화조도 없는 집이 많았다. 겉에서 보이는 골목이나 계단, 낡은 집의 불편보다 기본적인 생활기반이 절실함을 깨닫게 된다.



 서울시는 앞으로 장수마을의 근현대 역사·문화를 보전하고 마을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주거와 삶의 질을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방안을 마련한다고 한다. 주민이 스스로 동네를 생각하고, 그것을 돕는 행정과 정책이 따라준다면 이보다 다행한 일은 없겠다. 다만 관심이 지나쳐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쏟아 부으면 제대로 담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밤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철없이 성곽 위에 올라가 떠들던 연인들도 차편 때문인지, 추워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는지 어느새 모두 사라졌다. 마을은 불편함을 내색하지 않고 고요히 잠겨 있었다. 멀리 동쪽으로 펼쳐진 땅 위에 보석을 뿌린 듯 ‘삶의 빛들’이 어둠 속에 빛났다. 밤늦게까지 농구를 하던 한성대 학생들의 소리도 이내 잠잠해 졌다.



 밤은 고요하고 부드러웠다. 가까이에 사는 독일인 직원 다니엘의 옥탑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성곽 길을 따라 장수마을로 오는 길에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누군가의 집에 놀러 가서, 이렇게 저녁도 먹고, 동네 자랑도 할 겸 돌아다니면 참 좋겠는걸.” 그렇다. 우린 좋은 동네에 살면서 그것을 모르거나, 즐기고 누릴 마음의 여유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조정구(46)=건축가. 2000년 구가도시건축 설립. ‘우리 삶과 가까운 일상의 건축’을 화두로 삼고 있다. 대표작으로 서울 가회동 ‘선음재’, 경주 한옥호텔 ‘라궁’ 등이 있다. 2007년 대한민국 목조건축 대상을 받았고, 2010년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작가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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