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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의 돌멩이

중앙선데이 2012.04.21 23:32 267호 31면 지면보기
빌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재임한 지 2년이 지난 1994년 초 큰 위기가 발생했다. 최대 교역국 중 하나인 멕시코가 국가 부도 상황에 처한 것이다. 페소화 가치가 급락하고, 외환보유액이 바닥나 채무상환 불능상태에 빠졌다. 멕시코가 파산하면 불법이민자가 대거 미국 국경을 넘어올 것이고, 국제 교역량이 줄어 미국 경제가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멕시코를 원조해 파국을 막는 것이 시급했지만 이는 정치적으로 매우 인기 없는 일이었다. 국민은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 80%가 멕시코 원조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멕시코가 소생하지 못하면 돈을 잃게 될 뿐 아니라 클린턴의 대통령 재선은 물거품이 될 게 명백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멕시코에 280억 달러를 지원하는 결정을 내렸다. 참모들조차 깜짝 놀랄 만큼 신속하고 대담한 결정이었다. 결국 그의 지원으로 멕시코는 위기에서 벗어나 예정보다 3년이나 앞당겨 경제 회생에 성공했다. 정치평론가들은 이 결정을 “클린턴 재임 중 가장 인기 없고 이해받지 못했던, 그러나 가장 중요한 외교정책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통령은 여론조사를 통해 국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특정한 시점에서 무엇이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여론조사가 도로 먼 곳까지 내다보고 모퉁이까지 살펴야 하는 결정을 좌우할 수 없다. 국민은 장기적으로 나라에 옳은 일을 하라고 대통령을 고용한 것이다. 멕시코를 돕는 일은 미국에 옳은 일이었다.”

클린턴이 치명적 섹스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대통령으로 살아남은 비결은 여론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를 벗어나 먼 곳까지 내다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데 있을 것이다. 여론이란 보이는 현상에 직접적 영향을 받는 집단적 의식으로서 감정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여론은 현재 상태에만 쏠리기 때문에 사회의 장기적 비전을 형성하지 못한다. 사람으로 치자면 여론은 수시로 변하는 감정과 같다고 할까. 자신의 감정만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은 미래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고 비전을 갖지 못한다. 사람이 제대로 살려면 감정의 변화에 유의하되 이에 사로잡히지 않고 냉철히 판단하며 삶을 가꿔 나가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 지도자는 여론을 주의깊게 살피되 여론을 극복하며 나아가는 비전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요즈음 우리 사회는 여론이 적정선을 넘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 같아 염려된다. 마치 감정이 잔뜩 올라 흥분한 상태에 있는 사람과 같다고 할까. 4·11 총선에서도 여론조사가 후보자를 결정하거나 정책을 결정하는 등 핵심적인 기능을 했다. 평상시에도 사회적 이슈가 생기면 냉정한 분석에 앞서 여론조사 결과부터 공표한다.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의 장래에 대해 소신을 펴기보다는 여론 향배에 따라 눈치를 보며 줄타기를 하게 된다. 몇 년 전에는 ‘정책 결정을 아예 여론조사에 의해 결정하자’는 웃지 못할 제안까지 나왔었다. 이렇게 되면 선거도 필요 없고 여론조사를 처리할 컴퓨터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여론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되면 역사를 내다보면서 국민을 이끄는 ‘지도자’가 아니라 여론의 눈치만 살피는 근시안의 ‘아첨꾼’만 나타날 것이다.

클린턴은 임기의 마지막 밤을 백악관 집무실에서 작은 돌멩이를 들여다보면서 지냈다. 닐 암스트롱이 1969년 달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참모들이 회의하다가 종종 논쟁이 벌어져 흥분하면 그는 이 돌을 가리키며 “이 돌은 36억 년 전에 만들어진 거랍니다. 우리는 모두 잠시 스쳐 지나가는 목숨들일 뿐입니다. 마음 가라앉히고 일을 계속합시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는 “그 돌 덕분에 역사를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긴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지도자의 생명은 역사를 의식하며 길게 보는 지혜를 갖고, 또한 여론을 넘어서는 용기를 갖는 데 있다. 자기가 믿는 바를 따르다가 여론에 부딪혀 희생될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국민 80%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신 있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지도자가 몇 명이나 될까? 요즈음 대권 행보에 바빠진 여야 대선주자들에게 한강변에서 잘생긴 돌멩이를 주워 하나씩 보내 주면 좋지 않을까, 실없는 생각을 해 본다.



윤재윤 춘천지방법원장을 마지막으로 30여 년간의 법관생활을 마쳤다. 철우언론법상을 받았으며, 수필집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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