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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10년’, 독일식 역내무역으로 막아내자

중앙선데이 2012.04.21 23:01 267호 22면 지면보기
일러스트=강일구
우리나라는 세계 7대 수출 강국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전만 해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출 비중이 40%였지만 그 뒤 52%로 늘었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글로벌 수출기업의 약진에 힘입었다. 국내 주식시장에서 이들 기업의 주가가 계속 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구석구석이 수출 증가의 혜택을 보는지는 의문이다. 한국은행은 올해 우리나라 성장률을 3.5%로 전망했다. 지난해 3.6%보다 약간 떨어졌다. 더 눈여겨볼 것은 향후 성장률도 빨리 오르지 않을 것 같다는 한은의 전망이다. 우리 주식시장의 결정적 변수인 수출 문제를 투자자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 사고의 틀을 정리해 본다.

증시 고수에게 듣는다

수출 국가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한국·일본·대만처럼 자국 영토에서 노동력과 자본을 결합해 물건을 만들어 수출하는 것이다. 둘째, 사우디아라비아·인도네시아처럼 가공하지 않은 원자재를 내다 파는 것이다. 셋째, 싱가포르·네덜란드처럼 수입품에 마진을 붙여 다른 나라에 수출하는 중계무역의 비중이 높은 나라가 있다. 마지막으로 독일처럼 제조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역내 수출에 주력하는 경우다.

이들 중 첫 번째 유형에서 장기간 수출 경쟁력을 상실하는 나라,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을 겪은 나라가 많이 나왔다. 일본이 1990년대 초반부터 20년 가까이 장기 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한 데 이어 대만은 90년대 후반 비슷한 홍역을 앓았다. 일본은 부동산 등 자산가격의 거품 붕괴 충격과 엔화 강세로 인한 기업들의 생산기지 해외 이전이 겹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대만 역시 기업들이 중국으로 공장을 대거 이전하면서 고전했다.

첫 번째 유형의 수출 국가들은 원래 ‘국내 생산, 해외 판매’ 시스템이었다. 성장 초기에는 임금이나 임대료가 높지 않아 대부분 국내에서 생산한다. 그러나 소득이 늘고 임금이나 임대료가 오르면서 해외 생산이 늘어난다. 물론 관세장벽을 피하기 위한 생산 현지화나 생산시설 국내 집중으로 인한 리스크 분산이라는 취지도 있다. 이런 상황이 가속화해 국내 본사에 전략기획이나 디자인 등 부서만 남기고, 생산거점을 대부분 해외로 옮긴다면 상황이 심각해진다. 기업은 최적 시스템을 구축하겠지만 본국의 일자리가 줄고 내수경기가 위축되면서 경제 성장이 정체된다.

이에 비해 원자재 수출국이나 중계무역 국가는 생산기지 이전 리스크에서 자유롭다. 독일처럼 유럽 역내무역을 많이 하는 국가는 수출 비중은 크지만(GDP 대비 수출 비중은 47%), 유럽 대륙 안에서 무역을 하기 때문에 생산기지를 이전할 유인이 적다. 결국 첫 번째만 생산기지의 해외 이전 리스크에 크게 노출된 유형인 셈이다. 우리나라도 그 유형에 속하지만 다행히 ‘잃어버린 10년’과 같은 고통이 본격화하진 않았다. 여기에는 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원화 약세로 그나마 수출 경쟁력이 강화된 점이 한몫했을 것이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국내 기업들도 해외로 생산거점을 이전하는 일이 늘어날 것이다. 기업이 곳간에 쌓아 둔 현금도 국내 투자보다 해외에서 싸게 나온 기업 매물을 인수합병(M&A)하는 데 쓸 가능성이 크다. 국내로 눈을 돌리면 가계 부채와 인구 고령화 문제가 심각하다. 다들 내수 위축을 초래하는 악재다. 사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엔화 강세에 따른 생산기지 이전과 자산가격 버블 붕괴에 더해 인구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탓이다. 글로벌 경쟁력을 지닌 기업의 이익이 늘어나는 것은 박수 칠 일이지만 구매력을 가진 경제활동인구가 줄면 소비가 감소하고 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진다.

이런 현상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이 중심이 돼 아시아의 역내무역권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이 자유무역협정(FTA)의 허브가 돼 수출 동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 유럽에서 수출로 먹고사는 독일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또 성장일로에 있는 중국과 경쟁하는 산업이 아니라 중국의 성장을 보완할 수 있는 산업을 키워야 한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을 많이 육성하는 것도 시급하다. 일본 부품산업이 한국의 고도성장기에 쏠쏠한 재미를 봤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환율 강세기조를 만들어 내수산업을 키우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는 득실을 잘 따져봐야 할 문제다. 한국은 90년대 중반에 별다른 준비 없이 내수경기를 진작했다가 97년 외환위기라는 국난을 당한 경험이 있다. 내수를 풀기 전에 규제 완화를 통해 내수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중국이 내수 비중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환율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97년 한국의 쓰라린 체험을 반면교사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발전상에 수출 중심의 경제구조가 일등공신이었다는 건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매사에 명암이 있듯이 일정한 성숙 단계에 이르면 생산기지의 해외 이전과 국내 수요 위축이라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된다. 최근 글로벌 경쟁력을 지닌 기업은 고도성장을 거듭하는 데 비해 나라의 성장률은 지지부진한 괴리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 국민은 늘 위기를 잘 헤쳐 나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주의, 근거 없는 자신감(hubris)은 곤란하다.
 


김경록(50) 2000~2009년 미래에셋자산운용에서 채권운용 최고투자책임자(CIO)와 채권·금융공학부문 대표를 지냈다. 지난해부터 미래에셋자산운용 경영관리부문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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