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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최초’ ‘고급’ 기록을 양산한 메르세데스 벤츠

중앙선데이 2012.04.21 22:56 267호 24면 지면보기
120여 년간의 내연기관 자동차 역사는 크게 두 시기로 갈린다.
20세기는 양산차 메이커가 다수 출현한 시대다. 주도세력은 기계공학자였다. 잘 달리는 차를 잔고장 없이 만드는 것이 제품 경쟁력이었다. 초기에는 미국과 독일ㆍ영국ㆍ프랑스ㆍ이탈리아 등 구미 국가들이 각축을 벌였다. 후발 주자로 일본ㆍ한국이 뛰어들었다. 크게 보면 메르세데스 벤츠(Mercedes Benz·이하 벤츠)와 도요타의 승리로 귀결됐다. 대중차에선 대량생산과 품질관리(QC)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도요타가 시장을 석권했다. 고급차에서는 기술과 안전, 명품 브랜드의 대명사 벤츠가 압권이었다. 특히 “자동차의 미래를 알려면 벤츠를 보라”는 말이 100년 가까이 상식으로 통했다.

김태진 기자의 Car Talk 브랜드 이야기 ⑤ 메르세데스-벤츠


벤츠의 정통 전륜구동 B클래스 올해 출시된 이 차종은 가로 배치 엔진과 듀얼클러치(DCT) 변속기를 달았다. 세단과 SUV의 장점을 모은 크로스오버 스타일로 넓은 실내공간과 날렵한 핸들링이 특징이다. 가격은 3000만원대.
21세기 들어서는 자동차에 전자산업이 깊숙이 침투하면서 경쟁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전자·전기공학자들이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여느 산업처럼 자동차와 정보기술(IT)의 융합이 진전됐다. 자동차의 각종 전자장치를 운전자 또는 휴대전화와 연결해 주는 인터페이스(Interface·접속 기제)가 큰 경쟁력으로 떠올랐다. 포드가 IT 거인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잡고 세계 정상 탈환을 꿈꾸는 것은 그런 이유다. 이런 변화의 물결에 휘청한 곳이 벤츠다. 튼튼함과 고급스러움을 겸비한 점에서는 여전히 최고지만 IT 쪽에선 동작이 느렸다. 한국 시장만 봐도 내비게이션ㆍ블루투스 같은 IT 전장(電裝)에서 BMW에 뒤지면서 수입차 1위 자리를 내줬다.

‘세 꼭지 별’을 형상화한 벤츠 엠블럼은 연산 300만 대의 미국 대중차 브랜드 크라이슬러를 덥석 인수하면서 급격히 빛을 잃어갔다. 당시 세계 자동차 업계에선 ‘세계 빅5(생산량 기준)에 들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떠돌았다. 그만큼 덩치 불리기 조바심이 다들 컸지만 결과적으로 틀린 말이었던 것이다. 최고 프리미엄과 범용 브랜드의 결합은 숱한 화제와 기대를 낳았지만 합병계약 서류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독일과 미국 기업조직 문화의 충돌이 불거졌다. 미국 언론은 ‘나치가 돌아왔다’며 벤츠를 격하게 몰아세웠다. 신차 개발도 혼란스러웠다. 고급차 기술을 크라이슬러에 접목하면서 일부 모델은 ‘저렴한 벤츠’라는 시너지 효과를 냈지만 두 회사 본연의 브랜드 가치는 희석되기 시작했다.

뒤처진 업체들엔 기회였다. BMW는 벤츠의 취약 분야인 중소형 세단과 스포츠유틸리티차(SUV) 모델을 앞세워 2006년 처음으로 벤츠를 제치고 세계 고급차 1위 업체로 뛰어올랐다. 아우디도 벤츠를 턱밑까지 추격해 들어왔다.

벤츠에 크라이슬러는 ‘잘못된 만남’이었다. 정신이 번쩍 든 벤츠는 2007년 크라이슬러를 포기하지만 10조원 넘는 손해를 피할 수 없었다. 프리미엄 체급으로 돌아왔지만 10년 공백은 컸다. 큰 차를 팔아 넉넉한 마진을 챙기던 시대가 가고 소비층이 두터워진 소형차ㆍ친환경차 시대를 맞아 박한 이문을 놓고 싸워야 했다.

벤츠는 ‘연만(年晩)한 부자의 큰 차’라는 이미지부터 벗으려 노력했다. 30~40대 연령의 성공한 청·장년층을 끌어들이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고 본 것이다. 후륜구동만 고집하던 벤츠는 소형차 개발을 위해 2000년대 초 전륜구동 모델을 내놓는다. 차고가 높은 해치백 스타일의 AㆍB클래스다. 10년 가까이 내공을 쌓아 ‘전륜구동도 벤츠가 만들면 다르다’는 포부 아래 올해 신형 B클래스를 출시했다. 엔진을 전륜구동에 맞게끔 가로 배치로 바꿨다. 승차감을 좌우하는 서스펜션을 숙성시켜 코너링을 날렵하게 했다. ‘키만 높다’는 비판을 고려해 키를 낮추면서 실내공간이 더 넓도록 차체를 가다듬었다. 시대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는 첫 작품을 내놓은 것이다.

벤츠의 힘은 여태껏 이랬다.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세계 자동차 업계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2003년 나온 4도어 쿠페 CLS가 그렇다. 유선형 쿠페는 뒤 유리창 곡선이 날렵하게 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이런 디자인 때문에 뒷좌석이 비좁아 애완견이나 태울 정도였다. 또 2도어가 상식이었다. 벤츠는 쿠페를 대중화하기 위해 뒷좌석에도 성인 체구가 앉을 만한 공간이 있고 탑승이 편리한 4도어 쿠페 CLS를 내놓았다. 그러자 다른 자동차 업체들도 이런 차를 만들었다. 제대로 따라해 재미를 본 것이 폴크스바겐 4도어 쿠페 ‘CC’다.

벤츠의 역사는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첫 가솔린 자동차와 첫 디젤 승용차(260D), 첫 트럭, 첫 버스가 벤츠 몫이었다. 벤츠는 또 안전기술의 산실이었다. 일찍이 1930년대 도어 안전잠금장치를 개발한 데 이어 51년 충돌사고 때 엔진이 아래로 밀려나 운전자의 부상을 막는 차체를 만들어 냈다. 53년에는 충격을 흡수하는 차체 구조(크럼플 존)를, 59년에는 안전벨트를 만들었다. 세계 첫 차량 충돌시험을 한 것도 벤츠였다. 2000년대 들어서도 브레이크잠김방지장치(ABS)와 에어백, 자세제어장치(ESP)를 벤츠가 처음 적용했다.

벤츠 역대 최고의 명차로, 54년 출시된 스포츠카 300SL(사진1)을 꼽는 이가 많다. 문이 새의 날개처럼 열려 마치 갈매기가 날아가는 듯한 ‘걸윙도어(Gull wing door)’를 세계 처음 만들어 양산차에 적용했다. 3L 215마력 엔진을 얹고 최고 250㎞ 시속을 냈다. 걸윙도어에 시속 200㎞ 이상 달려도 문제가 없는 차로 만드는 것은 고난도 생산기술이 필요했다. 당시 자동차 업계에서는 ‘벤츠 아니면 불가능한 기적’이라는 말이 나왔다. 300SL은 54∼63년 3258대가 생산됐다. 이후 람보르기니 같은 스포츠카 업체에 걸윙도어 붐이 일었다. 이 차는 2010년 거듭 태어났다. 신형 SLS AMG(사진2)가 그것이다. 걸윙도어라는 현대적 디자인을 한층 다듬고 최고시속은 300㎞를 넘겼다. 한국은 벤츠의 최고 시장 가운데 하나다. 2억원에 육박하는 대형 S클래스, 중형 E클래스 판매 순위는 미국ㆍ독일ㆍ중국ㆍ영국에 이어 세계 5위다.

벤츠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으로 몰려 창업 일가가 모두 쫓겨났다. 이후 독일 정부(대주주 도이체방크)가 지배구조에 큰 영향을 미친다. 독일 최고 인재들이 몰렸지만 조직은 관료적인 편이다. 의사결정이 신중하다 못해 느리다는 평을 듣는다. 요즘 세상은 예전보다 빠르게 돌아간다. 금융위기·유가급등처럼 신속한 대응이 필요한 경영 리스크가 빈발한다. 소형차ㆍ친환경차 개발이나 자동차 IT화에 대한 전략 마련도 시급하다. 벤츠의 장인정신이 광속시대에 어떻게 적응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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