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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서 귀국하던 ‘조선 사회주의 삼총사’ 일제에 체포

중앙선데이 2012.04.21 22:50 267호 26면 지면보기
모스크바 공산청년대학(국제레닌학교)에서 공부한 멤버들. 앞줄 왼쪽 둘째부터 김태연(김단야), 박헌영, 양명(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이고 뒷줄 오른쪽 셋째가 박헌영의 첫 부인 주세죽이다. 뒷줄 오른쪽 첫째가 베트남 혁명의 영웅 호찌민이다. [사진가 권태균]
새로운 사상의 등장
④ 코민테른과 화요회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1922년 3월 25일 상해 황포탄(黃浦灘) 부두. 훗날 조선 사회주의 삼총사라 불리는 김태연(金泰淵:김단야), 박헌영(朴憲永), 임원근(林元根)은 대고양행(大古洋行) 소속의 기선 북해환(北海丸)에 올랐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작성한 ‘적화(赤化) 조선인 김태연 외 2명 체포 취조 개요’는 이들이 압록강 대안(對岸)의 안동현(安東縣:현 丹東시)에 도착하자 이륭양행(怡隆洋行)의 최준(崔俊)이 마중 나왔다고 전한다.

아일랜드인 쇼가 운영하는 이륭양행은 임정 교통국 산하였으니(대한민국 임시정부④ 의친왕 망명사건 참조) 이때만 해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선 비록 노선은 다르지만 같은 독립운동 세력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경찰망을 분산시킬 생각에서 먼저 신의주로 간 김태연은 4월 3일 오전 7시10분 남대문역(현 서울역)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다 신의주 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안동현 옛 시가(市街) 중국음식점 영빈루(迎賓樓)에 잠복해 입국 기회를 엿보던 박헌영과 임원근도 신의주 경찰서와 안동현 경찰서의 합동 수색으로 체포되었다. 셋은 국내로 압송되어 신의주 지방법원과 평양 복심(覆審)법원에서 공산주의 선전 혐의로 각각 1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1924년 1월 18일 출옥했다.

1 코민테 른 회원증.1920~40년대 코민테른은 세계 사회주의자들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었다. 2 몽양 여운형.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의 주요 멤버였다.
김태연은 경상도 김천, 박헌영은 충청도 예산, 임원근은 경기도 개성으로 출신지와 성장 배경이 달랐지만 묘한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해방 후 북한에서 노동당 비서를 지낸 허정숙(許貞淑)의 전 남편 임원근이 1963년 서울에서 고종명(考終命)한 것이 그나마 순탄한 마무리였다. ‘김단야’란 가명이 더 유명한 김태연은 평생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했지만 1938년 소련 내무인민위원부에 일제의 밀정 혐의를 받아 사형당했다. 박헌영도 김일성에 맞섰다가 미국의 간첩 혐의로 1956년 사형당했다. 가장 적대했던 세력의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는 역설의 주인공들이었다.

세 사람은 국제공산청년회의 지시로 국내에 공산주의 청년조직을 만들기 위해 입국하려 한 것인데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 당원이란 공통점도 갖고 있었다. 앞의 총독부 경무국 기록은 세 명에 대해 “김만겸(金萬謙), 여운형(呂運亨), 안병찬(安炳瓚) 등이 (상해에서) 조직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원으로서 조선에 잠입해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조선 전도(全道)를 적화(赤化)하려는 사명을 띠었다”고 전하고 있다.

박헌영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의 청년조직인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책임비서였고, 김태연·임원근은 중앙위원이었다. 박헌영이 1925년 결성된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책임비서를 맡게 되는 것은 일찍부터 청년운동에 종사했던 이런 배경이 있었다. 이동휘가 이끄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좋게 말하면 국제주의 성향이 강했다.

코민테른은 두 당을 통합시켜 당력을 극대화시켜야 했다. 코민테른이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를 열어 두 당의 통합을 시도한 것은 이런 목적을 달성시키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르쿠츠크파가 통합에 반대하고 대회장을 떠나면서 통합대회가 무산됐음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이 이르쿠츠크파의 손을 들어주면서 한국 공산주의 운동은 왜곡되기 시작했다.

일제의 ‘정재달·이재복(鄭在達·李載馥) 신문조서’ 등에 따르면 코민테른은 1922년 12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지휘부를 불러 의견을 청취한 후 양 파를 모두 해산시켰다. 그러곤 코민테른 극동부(동양비서부) 산하에 코르뷰로, 즉 고려국(高麗局)을 설치해 국내 당 건설 임무를 맡겼다. 표면적으로는 코민테른이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사이에서 중립을 지킨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르쿠츠크파에 국내 공산당 건설 임무를 맡긴 것이었다.

이런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국제공산청년회는 김태연·박헌영·임원근 등을 국내로 밀파하고 코르뷰로는 신철(辛鐵:신용기)·김재봉(金在鳳)·정재달(鄭在達) 등을 밀파했던 것이다. 코르뷰로 주요 멤버였던 김찬(金燦:김낙준)이 일제 신문조서에서 “정식으로 말하면 코민테른에서 받은 지령이었지만 사실은 이르쿠츠크파 사람들로부터 사명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사정을 말해준다.

삼총사가 옥중에 있던 1923년 4~5월께 김찬·신철·김재봉 등이 잇따라 서울에 잠입했다. 김찬이 신문조서에서 ‘김재봉은 코민테른으로부터 당 기관을, 신철은 공산청년회를 조직하라’는 지령을 받고 입국했다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코민테른 한국지부인 당과 국제공산청년회 한국지부인 공산청년회를 조직하는 것이 입국 목적이었다. 일본인들과 친교가 있었고, 사이토(齊藤) 총독과도 면회했던 김찬은 합법적인 운동에 나섰고 김재봉과 신철은 지하공작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 창건 작업은 쉽지 않았다. 국내 사회주의 인사들이 코민테른 밀사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내 사회주의 인사들은 조선공산당은 국내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결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는 이르쿠츠크파를 중심으로 당과 청년조직을 건설하려는 코민테른의 방침과 달랐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코르뷰로에서 파견된 정재달은 1923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을 거쳐 6월 서울로 잠입했지만 국내 인사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정재달은 일제 신문조서에서 북성회의 “김약수는 자신의 말을 듣기만 하고 아무런 견해도 피력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정재달에게 가장 강하게 반발한 세력은 국내파 사회주의 세력인 서울청년회 계열이었다. 급기야 정재달은 1923년 9월 조선노동공제회 집행위원이자 서울청년회 계열인 차금봉(車今奉:제4차 조선공산당 당수) 등에게 동소문 근방의 산중에서 폭행까지 당했다. 정재달이 조선노동공제회를 자신이 만든 것처럼 말하고 다녔다는 이유였다. 결국 정재달은 임무 달성에 실패하고 1923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

코민테른이 이르쿠츠크파를 중심으로 공산당을 건설하려 하자 상해파 영수 이동휘는 1923년 12월 코르뷰로를 탈퇴했다. 이에 코민테른 극동부는 1924년 2월 코르뷰로를 해체하고 3월에 오르그뷰로, 즉 조직국(組織局)을 설치했다. 명칭은 바꾸었지만 임무는 마찬가지여서 이르쿠츠크파를 중심으로 당과 청년조직 건설이 계속 시도되었다. 하지만 코르뷰로나 오르그뷰로에 대해 국내 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신철과 김재봉은 코르뷰로로부터 받은 임무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하게 활동했다.

제1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되는 김재봉은 경북 안동의 유림 출신으로서 1921년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즉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 건’으로 6개월을 복역하고 러시아로 갔다가 이르쿠츠크파에 가담하면서 공산주의 운동에 발을 디뎠다. 경상도 사천(삼천포) 출신 신철은 이르쿠츠크 군정대학을 졸업했는데, “국내 사정에 어둡고 한국어보다 러시아어가 더 편하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신철과 김재봉 등은 1923년 5월(8월?) 서울 경운동 김찬의 집에서 코르뷰로 국내부를 결성했다. 김찬과 김재봉·신철·이봉수(李鳳洙)·김약수·신백우(申伯雨)·원우관(元友觀) 등이 중심 인물인 코르뷰로 국내부는 코르뷰로 파견원과 재일 유학생들이 주축인 북성회의 연합 조직이었다. 그러나 국내의 가장 큰 운동세력이었던 서울청년회 계열을 배제해 파쟁의 소지가 있었다.

코르뷰로 국내부가 비밀조직이라면 1923년 7월 서울 낙원동에서 결성된 ‘신사상연구회’는 공개조직이었다. 홍명희(洪命憙)·홍증식(洪<7494>植)·윤덕병(尹德炳)·김찬·박일병(朴一秉) 등이 “홍수처럼 몰려오는 신사상을 연구해서 조리 있게 갈피를 찾아보자”는 명분으로 조직한 신사상연구회는 1924년 11월 카를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인 데서 착안해 ‘화요회’로 개칭하고 연구단체에서 행동단체로 전환했다. 화요회가 1925년 결성되는 조선공산당의 모체가 되는데 사실상 이르쿠츠크파와 북풍회의 연합조직체로서 역시 서울청년회는 소외되었다.

1924년 2월 결성된 신흥청년동맹은 이들의 표면조직체였다. 신흥청년동맹은 결성 직후인 그해 3~4월 전국 각지에서 ‘청년문제 대강연회’를 개최하는데 여기에 홍명희·김찬·조봉암·신철뿐만 아니라 갓 출옥한 박헌영도 가세했다. 개벽 1924년 9월호는 신흥청년동맹 박헌영이 기고한 “국제 청년 데이의 의의”라는 글을 게재했다. 박헌영은 이 글에서 1924년 9월 제10회 국제 청년대회 개최 소식을 전하면서 “전 세계 무산청년의 국제적 기념일을 앞에 두고 우리 고려 청년은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국제 청년대회의 의의를 밝히는 동시에…(29행 〔총독부에서〕 삭제)…미래의 세상은 청년의 것이다(1924년 8월 18일)”라고 말하고 있다. 박헌영은 이렇게 이론가이자 청년조직가로서 공산주의 운동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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