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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과 희망 주는 여섯 숫자...대박꿈에 치른 돈 10년간 25조

중앙선데이 2012.04.21 22:19 267호 14면 지면보기
“자동으로 하나 주세요.”
18일 서울 상계동 주공 10단지 아파트 상가에 있는 스파 편의점. 찌익 소리를 내며 기계에서 종이 한 장이 뽑아져 나온다. 점원이 “5000원입니다”고 하자 손님 안색이 달라진다. “아니요, 1000원어치요.” 손님은 지갑에서 1000원짜리 한 장을 꺼내 건넨다. 로또 한 장을 받아 들고 가게를 나선 전업주부인 백모(35·서울 상계동)씨는 낯빛이 어두웠다.
그에게 말을 걸었다. “로또, 왜 사십니까.”

조심스레 로또를 지갑에 넣으며 백씨가 답했다. “경제적으로 힘들 때마다 한 번씩 사요.” 대출금 갚기가 빠듯할 때, 아이들 학비를 내야 하는데 수중에 돈이 없을 때, 그럴 때마다 백씨는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돈이 없으니 5000원을 로또에 ‘투자’하는 것도 부담이라고 했다. 1000원어치 로또를 사는 것도 그래서였다. 백씨는 “로또를 힘들 때마다 사서 지갑에 넣고 다니면 위안이 된다”며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스파 편의점은 로또를 찾는 사람들 사이에선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로또가 시작된 지난 10년간 1등 당첨자가 15번이나 나왔다. 이름은 편의점이지만 음료수나 과자를 사 먹는 이보단 복권을 구입하러 온 사람이 훨씬 많다.

손님이 많다 보니 이곳 점원이 5명이나 된다. 번갈아 일하고 분업도 돼 있다. 직원 한 명은 직접 찾아오지 못하는 손님들에게 우편으로 보낼 로또를 봉투에 정성스레 담는 일을 한다. 계산대엔 2명이 일을 한다. 한 명은 지난해 7월 발매되기 시작한 연금복권 판매를 전담하고, 나머지 한 명은 계산대를 맡는다. 이곳에서 로또를 사 가는 사람들은 대개 직접 번호를 고르지 않고 기계에서 자동으로 선택되는 ‘자동식’ 로또를 택한다. 당첨률이 높다는 생각에서다. 유모차를 끌고 온 아줌마에서부터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20대 여성들, 등산가방을 멘 중장년층까지 로또를 구입하는 사람들은 제각각이다. 대개는 ‘부정 탈지 모른다’는 생각에 기자와의 대화도 피했다.

“혹시라도 당첨돼 남은 인생을 편하게 살면 좋지 않소?” 이날 1만원어치 로또를 산 임모(64·서울 상계동)씨 말이다. 임씨는 매달 100만원대 월급을 받지만 노후가 걱정이라고 했다. “딸 셋이 은행에 다니고 집도 있지만 수중에 돈이 넉넉지 않아 로또를 사고 있다”고 말했다. 1등에 당첨되면 세가 나오는 건물을 하나 사서 은퇴하고도 아내에게 ‘집에서 논다’는 타박을 듣지 않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서울 상계동의 로또 명당 스파편의점. 조용철 기자
“로또 당첨됐다고 인생역전이 되나? 요즘 그건 불가능해. 1등 당첨금이 20억원대인데, 그걸로 인생 대박은 안 되지. 그저 좀 편해지는 거지.” 그에게 ‘로또’는 편안한 노후로 가는 지름길이었다.10여 분 뒤 주부들로 보이는 조모(49)·최모(55)씨가 강아지 세 마리를 끌고 가게로 들어섰다. 조씨는 “곧 결혼을 앞둔 딸이 있지만 먹고살 만하다. 급전이 필요해 로또를 산 건 아니다. 1등이 되면 친척들 집 한 채씩 사 주고 싶은데 이게 되겠느냐”며 “그저 재미로 좋은 꿈을 꿨다 싶을 때 복권을 산다”고 했다. 옆에 있던 최씨가 “금요일이나 토요일 오후가 되면 몇십 미터씩 줄이 길어지는데 요즘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지니까 로또를 많이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상도동에 사는 김모(69)씨는 매주 한 번씩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그가 이날 산 로또는 2만원어치. 그는 “복권 사는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했다. “지금까지 3등에 한 번 당첨돼 본 적이 있다”며 “1등이 되면 대박이란 생각에 여기 오는 걸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학자들은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복권이 등장했다고 추정한다. 일반화된 것은 로마시대.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복권 판매기금을 기반으로 로마의 복구자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선 1947년 12월 처음으로 복권이 발행됐다. 제14회 런던 올림픽 참가 경비를 마련한다는 취지에서 장당 100원에 발매했다. 모두 140만 장의 복권이 팔렸다. 이후엔 산업 근대화를 위한 자금 확보 차원에서 복권이 발매됐다. 70년대엔 주택복권이 인기 절정을 누렸다. 1등 당첨금은 당시 서울에서 집 한 채(약 200만원)를 사고도 남는 300만원이었다. 90년대 들어선 동전으로 긁어 당첨을 바로 확인하는 500원짜리 즉석복권이 유행했다. 지금의 전자식 로또복권이 도입된 건 2002년이다. 초기엔 당첨자가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어 당첨금액이 수차례 이월되면서 당첨금이 수백억원으로 불어났다. 로또 광풍이 그래서 일었다.

2003년 2월엔 부산의 한 지하철역에서 40대 남성의 투신사건이 일어났다. 빚을 내 무려 3000만원어치의 로또를 샀지만 정작 당첨금이 85만원에 불과하자 비관해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로또와 관련해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이어지자 정부는 2004년 복권 발행기관들을 복권위원회로 일원화하고 ‘관리’에 들어갔다. 로또복권의 경우 한 사람이 한 번에 살 수 있는 상한액을 10만원으로 낮추고 수백억원의 당첨금도 하향 조정했다. 하지만 로또 열풍은 여전하다. 2002년부터 2012년 4월 둘째주까지 누적 기준 판매대금은 약 25조2745억원. 매년 평균 2조원대의 복권이 팔려 나가고 있다.

복권위원회가 2011년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1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복권 관련 인식’ 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간 복권을 구입한 경험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60.1%에 달했다. 한 해 평균 구입 횟수는 로또복권 기준으로 16.4회다. 매달 한 번 이상씩 꾸준히 복권을 산다는 뜻이다. 평균 구입금액은 로또 복권이 7633원에 달했다. 또 남자들의 23.3%가 매주 복권을 사는 반면 여성들은 7.3%만이 매주 구입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A부장검사는 회식 때 ‘로또’를 메뉴로 올린다. 중요 사건 수사가 끝나면 수사관과 부하 검사들과 함께 회식 자리로 가는 길에 직급별로 5000~1만원씩 걷어 로또를 산다. 각각 한 장씩 나눠 주고 회식을 하면서 ‘당첨되면’이란 주제로 이야기도 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한번은 몇백만원이 실제로 당첨된 적도 있었다. 그는 “당첨금으로 회식을 하고 ‘아내용’ 선물을 사서 나눠 줬더니 모두 즐거워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재미 삼아 로또를 사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대박을 노린다. 로또계를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회사원 이모(39)씨는 직장 동료와 함께 ‘로또계’를 조직했다. 각각 60개씩 10줄의 번호를 골라 매주 1인당 1만원어치를 산다. 당첨됐을 경우 당첨자는 70%를 가져가고, 나머지 계원은 30%를 나눠 갖는 식이다. 이씨는 “계를 하면 한 사람이 하는 것보다 당첨 확률이 높지 않으냐”며 “1등 당첨금이 십수억원인데 동료일지라도 분배를 정확히 해 놓지 않으면 계가 이어질 수 없어 당첨금 분배룰도 정했다”고 했다. 외국도 이런 식으로 계를 하는 사례가 많다.

이렇게 만들어진 ‘계’는 분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4월 초 미국 메릴랜드주의 한 맥도날드 매장에서 일하던 멀랜드 윌슨(37)은 같은 일터 직원 15명과 함께 5달러씩 내는 로또계를 했다. 문제는 그가 당첨금이 우리 돈으로 약 7250억원에 달하는 6억4000만 달러의 ‘메가밀리언 복권’에 당첨되고서였다. 1등 당첨자는 총 3명. 각종 세금을 제외하고 그가 받게 될 당첨 금액은 1180억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첨 직후 “로또계에서 산 복권이 아니라 내가 따로 산 것”이라며 분배를 거부했다. 그러자 이번엔 매장 주인이 나섰다. “직원들 로또계에 보태라고 5달러를 냈으니 나도 당첨금을 일부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첨금 분배를 둘러싼 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10년을 이어 온 로또 열풍의 근저엔 사람들의 어떤 생각이 깔려 있을까. 이승협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는 로또에 투영된 심리를 ‘생존방식’으로 풀이했다. 그는 “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계기로 가난해도 노력을 통해 성공을 거머쥘 수 있는 일반인의 성공시대가 저물었다”며 “이런 부러진 성공의 사다리가 개인들로 하여금 로또에 몰입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생애주기마다 개인이 목돈을 부담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생활상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했다. 예컨대 성인이 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육아비와 교육비에 많은 돈이 들어가고, 자녀가 장성해 결혼할 땐 부모가 집값이나 예물·예단비로 거액을 쓰게 되는 데 반해 이에 대한 개인의 대비는 적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복지가 잘 돼 있는 유럽 국가에선 로또를 재미로 즐길 뿐 한국처럼 몰입하지 않는다”며 “안정적인 삶에 대한 불안감이 로또 열풍에 투영돼 있다”고 분석했다. 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1등이 될 확률은 적지만 누군가는 꼭 1등이 되고, 그게 내가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사람들이 로또에 기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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