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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앞에 평등

중앙선데이 2012.04.21 21:55 267호 34면 지면보기
“많이 들어요. 밥 많이 먹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다는 말도 있잖아요.” 얼마 전 여행 쪽 일을 하는 박 선생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전에도 몇 번 만났지만 식사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숟가락을 들면서 그가 이렇게 말했다. 외모만 보면 여행을 좋아할 것처럼 생겼지만 나는 거의 여행을 다니지 않는다. 솔직히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여행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밥 이야기를 했다.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한 게 아니라 밥 앞에 평등합니다. 누구나 먹어야 살 수 있죠. 그건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이 그래요. 목숨 있는 존재에겐 먹는 일이 가장 큰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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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언젠가 TV에서 작가 박경리 선생이 한 말씀을 기억했다. “원주 연세대 앞에 큰 호수가 있어요. 겨울이 오면 호수가 얼어. 거기 수위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밤에 천둥소리가 나 나가 보니 철새들이 호수가 얼지 않게 날개로 얼음장을 꽝꽝 내리치더라는 거야. 그 소리가 천둥소리 같더라는 겁니다. 호수가 얼면 철새들이 먹을 걸 잡을 수 없으니까. 이처럼 목숨 있는 것들은 참 고달프고 가엾지요.” 그 말씀을 들은 날 밤에 수백 마리 새들이 일제히 언 호수 위로 몸을 던져 얼음장 깨는 꿈을 꾸었고 다음 날 하루 종일 귀가 먹먹했다.

그는 밥을 성실하게 먹는다. 찬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맛있게 먹는다. 꼭꼭 씹어서 오래오래 부지런히, 그리고 참 맛있게 먹는다. 끼니 때마다 꼬박꼬박 밥을 챙겨먹는 일은 구차하면서 숭고하다. 그것은 사랑 같다. 자식이 집에 오면 어머니는 무엇보다 먼저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차려 주신다. 그러니까 자식이 제 입 속에 떠넣는 것은 어머니의 더운 사랑이 아닐까.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가서 우리가 하는 일은 축하이고 애도지만, 결국 밥 한 그릇 먹는 일 아닐까. 그저 밥 한 그릇을 먹는 일이 식구처럼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는 일은 아닐까.

그는 밥 한 그릇을 다 비운다. 당연한 것처럼 한 공기 더 주문한다. 내게도 권하지만 나는 사양한다. 입맛이 없었는데 어찌나 그가 맛있게 먹는지 덩달아 나도 한 공기를 다 먹어 배가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일본의 식당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때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 식사도 주방장 아저씨가 차렸다. 음식을 만들어 식사를 내놓는 사람의 마음은 한가지라서 아저씨도 그저 ‘식구’들이 맛있게 남김 없이 먹었으면 하고 바랐다. 배불리 먹고 “잘 먹었습니다”라고 하는 말이 아저씨에겐 가장 큰 기쁨이고 흐뭇한 보상이었다. 가끔 누군가 입맛이 없다고 밥을 안 먹겠다 하면 아저씨는 많이 속상해 했다. 그때마다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밥은 입맛으로 먹는 게 아니라 그냥 때 되면 무조건 먹는 거요. 그러니 억지로라도 한술 들어요.” 그러면 하는 수 없이 모래알 같은 밥알을 꾸역꾸역 삼키며 밥을 먹는 것이다. 그렇게 억지로라도 밥을 먹다 보면 신기하게 없던 입맛도 생기곤 했다.

그는 한 공기 더 주문한 밥도 싹 비운다. 적지 않은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이처럼 성실하게 밥을 먹는 사람은, 그것도 여성은 처음 보았다. 나는 감탄을 감추지 못한다. “정말 이렇게까지 착한 분인 줄은 몰랐어요.” 그는 씩씩하게 웃는다. “그런 말은 없어요. 제가 하도 밥을 많이 먹으니까 지어낸 말이죠.”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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