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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프 시몬스,질 샌더,에디 슬리먼...왕들의 귀환

중앙선데이 2012.04.21 21:33 267호 31면 지면보기
사진 로이터 연합, 질 샌더
메이저리그는 시즌을 마친 한겨울에도 뜨겁다. 에이스와 중심 타자들의 이합집산은 게임의 승부와는 또 다른 관심거리다. 이적 시장이 커지면 스토브리그는 진짜 난로처럼 뜨거워진다. 스포츠로 치면 ‘시즌’인 F/W 패션위크가 마무리될 즈음 패션계가 스토브리그처럼 들썩이기 시작했다. 2월 중순 질 샌더(69)의 복귀가 전해지더니 에디 슬리먼(43)은 YSL로 돌아왔다. 존 갈리아노가 유대인 모욕 발언으로 해고된 뒤 1년 넘게 대행 체제였던 크리스티앙 디오르도 후임을 찾았다. 질 샌더를 이끌던 라프 시몬스(44)다. 명문 구단으로 최고 스타가 잇따라 자리를 옮긴 최대 이적 시장이 열린 셈이다.

스타일 # : 패션계 '스토브리그'

# “디오르는 이 시대 최고의 재능을 지닌 라프 시몬스를 환영한다. 그와의 여정이 디오르 스타일을 21세기로 나아가게 만들 것이다.”
열흘 전 디오르는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라프 시몬스를 지명했다. 웬만한 디자이너는 다 후보로 거론됐고, 마크 제이컵스와는 ‘이적료’ 때문에 협상이 결렬되는 등 지난한 과정 끝의 발표였다.

벨기에 출신의 라프 시몬스는 ‘패션의 은둔자’로 불린다. ‘핫’ 셀레브리티로 등극한 다른 디자이너들과 달리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다. 그를 담은 자료 사진조차 몇 장 없다. 이력도 남다르다. 가구를 디자인하다 뒤늦게 패션계에 발을 들였다. 남성복 브랜드로 출발해 2005년 질 샌더에 들어가서야 여성복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한발 앞선 디자인과 군더더기 없는 절제미로 진가를 발휘했다. 창업자가 떠나고 갈팡질팡하던 브랜드를 완전히 되살렸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질 샌더 쇼는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놓쳐서는 안 될 쇼가 됐다. 하지만 조용한 디자이너의 미니멀한 디자인은 튀는 갈리아노의 여성스러운 디오르와 대척점에 있다. 그럼에도 디오르가 라프 시몬스를 선택한 건 추락한 갈리아노로부터 완전히 결별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라프 시몬스는 디오르에서 오트 쿠튀르로 또 한번 영역을 확장한다. 올 7월 선보일 그의 디오르 컬렉션이 가장 기대되는 이유다.

# 라프 시몬스의 이적설은 진작부터 파다했다. 2월 질 샌더 창업자인 질 샌더의 복귀 소식이 전해졌던 것이다. ‘미니멀리즘의 여왕’으로 불리는 그는 1966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만들었다. 과장되고 화려했던 70~80년대, 그는 최고급 소재와 절제된 디자인으로 선구적인 의상을 선보였다. 하지만 99년 브랜드는 프라다에 매각됐고, 그는 원단·디자인·가격의 대중화를 요구한 CEO와 갈등했다. 사임-복귀-사임을 거듭하더니 2004년엔 아예 은퇴해 버렸다.

그가 다시 나타난 건 2009년 유니클로와 함께였다. 고급 원단을 섬세하게 재단하던 디자이너가 저렴한 SPA 브랜드와 만났다는 데 모두 놀랐지만, 협업한 컬렉션 ‘J+’는 대박을 쳤다. 질 샌더는 이 작업을 이렇게 평가했다.
“유니클로는 기본으로 승부하는 회사가 스타일을 찾는 법을 배웠고, 나는 한정된 자원으로 최선의 디자인을 하는 법을 배웠다.”
타협하는 대신 박차고 나왔던 그도 유연해졌나 보다. 돌고 돌아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그의 원조 미니멀리즘도 다음 ‘시즌’에 선보일 예정이다.

# 에디 슬리먼도 돌아왔다. ‘세계에서 가장 옷 잘 입는 남자’ 스테파노 필라티를 뒤이어 YSL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됐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디올 옴므를 맡았던 그는 남성상을 바꿀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가 깡마른 모델에게 입힌 스키니룩을 소화하기 위해 옷 좀 입는다는 남자들은 죄다 다이어트했다. 천하의 카를 라거펠트까지 30㎏ 넘게 살을 뺐다. 남성복의 혁명을 가져온 그는 2007년 훌쩍 떠나 사진작가로 전향했다. 여행을 하고 전시를 열면서 5년을 보내고는 깜짝 복귀했다. 마침 그의 복귀는 남성복 디자이너로 쌍벽을 이루는 라프 시몬스의 ‘이적’과 맞물렸다. 라프 시몬스가 디오르에서 오트 쿠튀르에 도전하듯이 에디 슬리먼은 YSL에서 처음으로 여성복을 만든다. 최대 관전 포인트다.

샤넬의 카를 라거펠트, 루이뷔통의 마크 제이컵스가 그렇듯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브랜드의 얼굴이다. 패션 하우스의 방향을 정하고 미래를 좌우한다. 이들은 감독이면서 관중 앞에서 서는 유일한 플레이어다. 야구팬이 이적 현황을 보며 다음 시즌 성적을 예상하듯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교체도 패션 하우스의 미래를 가늠케 한다.
뜨거웠던 이적 시장은 마무리됐다. 무한한 기대감으로 ‘시즌’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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