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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 내면 버려지는 ‘며루치’처럼 아, 아버지

중앙선데이 2012.04.21 20:46 267호 8면 지면보기
20세기 최고의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비행기를 태워주던 나의 영웅이었지만 어느새 원망과 연민으로 얼룩진 쓸쓸한 조각배가 돼버린 이 땅의 거의 모든 아버지들. 대한민국의 아버지상을 대표하는 명배우 이순재, 전무송의 열연에 괜시리 숙연해지는 무대다.

연극 ‘아버지’, 4월 29일까지 동숭아트센터

‘영원한 광대’ 김명곤 연출이 1996년 한국 연극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던 ‘어머니’에 이어 관객에게 사랑받는 ‘대중 연극’을 표방하고 나섰다. 예술을 가장한 자아도취에 빠져버린 많은 순수 연극과 달리, 사회적인 이슈와 무거운 주제를 구현하면서도 유머감각과 인간미로 숨통을 틔우는 연극의 매력을 객석에 효과적으로 전달한 ‘명품 대중연극’이다.

1949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아서 밀러의 걸작을 우리 정서에 맞게 번안했다. 1940년대 미국의 상황을 2012년의 한국 사회로 치환한 무대는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대공황기에 대두된 청년실업, 주택대출, 노후대책 등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의 문제들은 21세기 한국에서 더욱 적나라해졌기 때문이다. 자본에 소외된 개인과 그로 인해 파생된 가족의 갈등이라는 큰 줄기에 스마트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라는 디테일한 설정을 더한 것은 자본 소외에 스마트 소외까지 겹쳐 더욱 고독해진 이 시대 아버지들의 단면을 아프게 드러낸다. 원작의 둘째 아들 대신 딸을 등장시킨 것은 가족과 사회 다양한 구성원의 공감의 폭을 더욱 넓히기 위한 장치다.

고층 아파트 불빛이 어슴푸레 비치는 영상을 뒤로 한 채 무대 전체를 에워싼 철책 구조물이 시선을 지배한다. ‘동네를 망쳐놓은’ 아파트 단지에 둘러싸여 사는 것이 “감옥에 갇힌 것같이 답답하다”는 아버지 재민의 심리를 상징하는 동시에, 정신분열 증상을 보이며 끊임없이 현실과 환상,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을 오르내리는 ‘야곱의 사다리’이기도 하다. 잘나가는 외판원으로 전국을 누볐던 자부심 이면에 당장 냉장고 수리비를 걱정해야 하는 비루한 현실은 ‘폭풍 속에서 항구를 찾는 조각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를 꿈꾸게 하고 환상을 불러낸다. 어두침침한 조명에 무채색으로 뒤덮인 현재를 눈부신 조명에 따뜻한 색들로 채워진 과거로 이어주는 구원은 자아분열이란 사다리뿐이다.

그러나 과거의 파편들은 불행한 현재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자아의 분열은 꿈을 포기했던 젊은 날의 자신과 자기 꿈을 투영했던 아들에 대한 회한의 2중구조로 나타난다. 분열된 자아를 대변하는 죽은 형님의 환영은 “진주조개를 캐려면 푸른 바다에 뛰어들어라, 시간이 없다”고 재촉한다. 젊은 시절 현실에 안주해 도전하지 못했던 ‘블루 오션’의 꿈에 대한 막연한 후회와 미련이다. “뭐든 꾸준히만 하면 성공한다”고 믿고 싶지만, “뭘 성공했느냐”는 형님의 단호한 물음은 그런 패러다임이 이미 구시대의 유물에 지나지 않음을 환기시킨다.

“배짱 있게 살아라. 네 앞에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꿈을 세우라”며 잃어버린 꿈을 대신해 주리라 모든 희망을 걸었던 아들 동욱이 자신의 외도에 상처받아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처지보다 더 믿기 싫은 불편한 진실. 아들의 현재를 외면하고 과거만 보려 하는 분열의 이유가 그의 현재를 더 비극적으로 만든다.
‘은색 그랜저를 반짝반짝 잘도 닦아놓던’ 사랑하는 아들에게 빛나는 미래를 선물하기 위해 마지막 선택에 이르는 비극적 심리는 마종기의 시 ‘며루치는 국물만 우려내고 끝장인가?’라는 직설화법으로 관객의 가슴을 적신다. ‘싱싱하게 헤엄치던 은빛 비늘의 젊은 며루치떼’였던 ‘즐거웠던 시절로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을까?’ 답이 없는 질문이다.

엔딩에 비로소 철책 밖에서 아파트 숲에 방해받지 않고 무대를 비추는 꽉 찬 보름달은 인생을 억지로 다 채우고 나서야 겨우 자본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아버지의 고독처럼 어둡고, 어둡다. 1949년 초연 이래 끊임없이 재생산돼 온 ‘세일즈맨의 죽음’. 그 또 하나의 버전에 새삼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이유는 빈틈없이 철책에 싸여 빠져나갈 수 없는 무대 한 귀퉁이에서 나와 내 가족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100자평
-김문환(연극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번안작품이라도 우리 상황을 잘 반영했고, 시의 선택이 탁월했다. ‘세일즈맨의 죽음’을 여러 차례 연기한 전무송은 이번에도 자기 역량을 충분히 발휘했다. 다만 조명이 정확히 비춰주지 못해 빛이 의도하지 않은 영상을 만들어낸 점은 아쉬웠다. ★★★★☆

-박정기(연극평론가, 한국희곡창작워크숍대표)
이순재 선생의 혼신을 다한 열연은 감동을 불러일으켰지만 상대 역인 명배우 차유경의 성격 창출은 다른 출연작에서의 발군의 기량에 비해 진정성이 부족한 겉도는 느낌이었다. 또한 원로 장민호 선생의 1993년 공연 이래 형님 역의 모든 배우가 백색 정장 차림으로 출연하는 것도 지양돼야 할 과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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