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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에 잠든 박영석 7월께 찾으러 갑니다

중앙일보 2012.04.21 00:00 종합 24면 지면보기
2011년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킹 중인 이인정 회장. 왼쪽 봉우리가 고 박영석 대장이 실종된 안나푸르나(8091m) 남벽이다. [사진=대한산악연맹]


서울 역삼동 산악문화회관 4층 대한산악연맹 이인정(67) 회장 사무실. 문을 열면 마치 산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다. 사무실 곳곳에 네팔·파키스탄 등 히말라야에서 건너온 온갖 잡동사니들이 널브러져 있고, 수십 년 동안 히말라야 등반을 떠난 후배들이 현지에서 보낸 엽서와 사진 수천 장이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 있다. 책상과 맞붙은 벽에는 사진 몇 장이 걸려 있다. 1971년 인수봉 등반 도중 부인 구혜정(64)씨와 함께 찍은 빛바랜 사진, 그리고 지난해 안나푸르나(8091m) 등반 도중 실종된 고 박영석 대장의 마지막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대한산악연맹은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이 회장은 7년째 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3년 전부터는 아시아산악연맹 회장도 겸하고 있다. 그는 그냥 ‘회장’이 아니라 산쟁이들의 ‘대부’다. 이 회장의 50년 산악 인생을 들어봤다.

창립 50돌 대한산악연맹 이인정 회장



●박영석 대장 사진을 보고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마음이 안 좋지요. 그래서인지 지난해 이후로 몸도 더 안 좋아지고. 영석이는 평생 위험한 도전을 하며 살아온 탐험가야. 저번 안나푸르나 사고는 ‘이건 안 되겠구나’ 생각하고 철수하다 눈사태를 맞은 거니까. 그래서 더 괴로워요. 그렇게 보낸 놈들이 영석이를 포함해 고미영·고상돈… 뭐 많아요. 고상돈은 77년, 그때까지만 해도 어렵게 살던 시절이잖아요. 그런 때에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으니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지요.”



●대학 산악부 시절에도 큰 사고를 겪었죠.



 “69년에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한국산악회 히말라야 원정을 앞두고 훈련하다가 눈사태로 동료 10명을 잃었어요. 그때부터 친구들을 보내기 시작해 수십 명 넘게 보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내 운명이지 싶어, 업이고. 지금 박영석탐험문화재단이 주축이 돼 영석이와 후배들 찾으러 가는 원정대를 꾸리고 있어요. 7월 말이나 출발하지 않을까 싶은데. 엊그제도 박영석 처, 고상돈 처와 함께 동학사(충남 계룡산)에 다녀왔어요. 조계종에서 산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낸다고 해서. 돌아오지 못한 친구를 뒤늦게나마 찾으러 가는 게 산악인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지요. 또 그런 일을 하는 게 산악연맹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고. 아휴 그래도 뭐 안타깝기는 매한가지지.”



●결국 동국대 산악부를 이끌고 마나슬루를 성공했는데.



“사고 난 뒤로 10여 년이 지나서 80년에 단일 산악회로는 처음으로 8000m 도전해서 성공했죠. 거기도 사연이 많지. 우리가 하기 전에 세 번의 시도가 있었는데, 대원·셰르파 포함해서 15명이나 사고를 당했어요. 한국 산악계로서는 아주 슬픈 산이지. 반면에 그것 때문에 한국의 히말라야 등반사가 시작됐다고 볼 수 있어요. 김정섭씨라고 대단한 분인데, 그분이 선도적으로 진출했어요. 근데 아이러니한 게 영석이 놈이 마나슬루 등정 성공한 우리 팀 카 퍼레이드를 보고 동국대 산악부에 들어왔어요. 무슨 인연인지, 당시 동국대 산악부가 유명하기는 했죠. 나도 동국대에 스카우트돼서 장학금 받고 들어갔잖아.”



●등반은 어떻게 배웠나요.



 “배웠다기보다는, 내가 인왕산 밑에서 컸거든. 산에서 바위 타고 돌아다니다가 몸에 익은 거지. 대학 때는 그 기술로 아르바이트도 했어요. 군대 제대한 다음 해인가, 추석 전에 어머니가 송편에 쓴다고 솔잎 따오라고 해서 인왕산을 뛰어다니고 있는데, 마침 거기서 영화 촬영을 하더라고. 남자 주인공이 바위를 타다 미끄러져 추락사하는 장면인데, 우물쭈물하고 있는 거야. 현장에서 바로 캐스팅됐지. 그 뒤로 한동안 충무로의 액션영화 스턴트맨으로 꽤 잘나갔어요.”



●당시에는 등반 장비도 형편없었을 텐데.



1971년 북한산 인수봉 등반 도중 부인 구혜정씨와 함께.
 “대개 군대 것을 가져다 만들어 썼지. 군대 장교복은 좀 두껍거든. 그걸 잘라서 니코보코 바지(이탈리아 스타일의 짧은 바지) 만들어 입고, 워커 발목 잘라서 클라이밍 슈즈 만들었지. 65년에 군대를 갔는데, 그 이듬해 바로 월남에 자원했어요. 전쟁터에 가면 등반 장비가 널려 있다는 거야. 가보니까 정말 창고에 로프·카라비너(타원형 쇠고리)가 잔뜩 쌓여 있어. 전쟁 끝나고 올 때 다른 친구들은 텔레비전·라디오 챙기는데, 나는 커피 몇 개 하고 장비만 잔뜩 가져왔지.”



●회장님 결혼 스토리도 산악계에서 유명한데요. 산악계에서 장가를 가장 잘 간 산악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하하하, 쓸데없는 소리. 군대 다녀와서 동아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 자리) 장비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하루는 젊은 여자가 버너를 하나 보여 달라고 해서 스위스제 버너를 꺼내 설명하는데, 이 여자가 뭘 잘 모르는 거야. 그때 내가 좀 까칠하게 굴었나 봐. 아무튼 그 사람이 지금 집사람인데, 우리 마누라는 내가 아주 마음에 안 들었대. 그 이후 우연찮게 산에서 또 만난 거야. 아르바이트 그만두고 원로 산악인 추천으로 이화여대 산악부 지도강사로 들어갔는데, 집사람이 이화여대 법대 산악부장을 하고 있는 거야. 그게 인연이 돼서. 그래도 결혼까지는 힘들었어. 나는 인물도 변변찮고 집에 돈도 없고 학교도 다니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우리 마누라는 귀한 집 자식이었으니까. 내가 처남이 넷 있는데, 집사람이랑 산에 갈 때 처남들이 늘 붙어 다니고 그랬어요. 처남들은 지금 대기업에서 회장으로, 사장으로 있고.”



●대한산악연맹이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지난 50년을 잘 추스르고, 앞으로 50년을 잘 설계하자는 취지로 산악인들의 의견을 모아 가고 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수십 년이나 늦게 히말라야에 진출했지만 지금은 세계 산악계를 주도하고 있어요. 앞으로 50년이 중요하지요. 이제 등산·트레킹이 국민 레저가 됐으니까.”



●올해 어떤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지요.



 “내가 임기 중에 하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어요. 첫째는 국립등산학교를 세우는 일입니다. 프랑스의 엔사(ENSA)처럼 나라에서 하는 등산학교가 필요해요. 요즘 산에 가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잖아요. 히말라야 등반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사고가 많이 난다고. 안전하게 산을 즐기는 법을 알려줘야 하고, 특히 학생들에게 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줘야 해요. 둘째는 네팔 포카라에 세계산악박물관이 있는데 거기에 한국관을 만들고 싶어요. 우리나라가 국제 산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요. 꼭 한국관을 만들고 싶고, 박영석 코너도 만들려고 애쓰고 있어요. 그리고 스포츠클라이밍이 전국체전 정식종목에 채택되도록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국내에 뛰어난 스포츠클라이밍 선수가 많죠.



 “우리나라 산이 채 2000m가 되지 않는데. 고산 등반뿐만 아니라 스포츠클라이밍·아이스클라이밍도 아주 강해요. 국민성 때문인 것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끈질기고 강인하잖아요. 김자인 같은 선수는 이미 세계랭킹 1위고,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면 금메달감이야. 지난해에는 2020년 여름 올림픽 후보 종목 8개에 스포츠클라이밍이 포함됐어요. 이 정도면 충분히 전국체전 정식 종목에 들어갈 수 있는 여건이죠.”



김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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