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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65) 73세 마오쩌둥

중앙일보 2012.04.16 01:03


▲류샤오치는 1920년대 노동운동 시절부터 광저우(廣州)에 와있던 호찌민과 가까웠다. 호찌민은 베이징에 올 때마다 류샤오치의 집을 방문했다. 69년 가을, 두 사람은 2개월 차이로 세상을 떠났다. 65년 5월, 중난하이 푸루쥐(福綠居)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호찌민(앞줄 가운데)과 류샤오치 일가. [사진 김명호]

장강 30리 헤엄쳐 중병설 날려버린 73세 마오쩌둥



1966년 7월 12일, 고향에서 요양 중이던 마오쩌둥은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으로 거처를 옮겼다. 16일 오후, 우창(武昌) 연안에 건장한 청년들과 수영복 차림으로 나타나 장강(長江·양자강)에 몸을 던졌다. 30리를 유유히 횡단하며 만천하에 체력을 과시했다.



뭍에 오른 마오는 수행원들에게 “사람들은 장강이 크다고 한다. 크다고 해서 무서워할 건 없다. 이 세상에는 큰 것들이 많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것들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유일하게 무서워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람은 자신의 몸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며 그간 나돌던 중병설을 일거에 날려 버렸다. 73세 때였다.



전국의 신문에 마오가 장강을 건너는 모습이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류샤오치는 건강 회복을 축하할 방법이 없었다. 홍위병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각급 학교에 공작조를 파견한 다음부터 마오는 류샤오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7월 18일 오후, 마오쩌둥의 전용열차가 9개월 만에 베이징에 들이닥쳤다. 국방부장 린뱌오를 비롯한 친위세력이 베이징지구를 완전히 장악한 것을 확인한 후였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은 헐레벌떡,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총리 저우언라이를 원망하며 달려 갔지만 마오를 만나지 못했다. 이미 역 구내를 빠져나간 후였다.



중난하이(中南海)로 돌아온 류샤오치는 좌불안석이었다. 해질 무렵 베트남의 호찌민에게 편지를 한 통 보내고 산책길에 나섰다.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류샤오치가 사는 푸루쥐(福祿居)와 마오쩌둥의 거처 쥐샹수우(菊香書屋)는 오솔길 하나로 통해 있었다. 평소 류샤오치는 이 길을 유난히 좋아했다. 매일 저녁, 부인 왕광메이와 호수로 산책 나가다 보면 어김없이 마오가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류샤오치는 창 밖에서 고개를 치켜들고, 마오는 창 밖으로 고개를 빼든 채 온갖 싱거운 소리 나누다 헤어지곤 했다. 보통 한 시간 정도였지만 남 흉보거나 옛날에 사귀던 여자 얘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찌나 재미있던지 두 시간을 훌쩍 넘길 때도 많았다. 베이징 골목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정경이었다.



이날 마오의 창문은 평소와 달랐다. 커튼이 쳐지고 굳게 닫혀 있었다.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았다. 류샤오치는 마오의 집 정문 쪽으로 갔다. 주차장에 자동차가 여러 대 서있다. 저우언라이의 차를 확인한 류샤오치가 집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경호원이 제지했다. “주석은 휴식 중이다. 아무도 만날 수 없다. 다른 날 약속을 잡기 바란다.”



저우언라이가 나오고 있었다. 입을 훔치는 것을 보니 밥을 먹고 나오는 것 같았다. 류샤오치는 황급히 나무 뒤로 모습을 숨겼다.



그날 밤 류샤오치는 왕광메이를 시켜 저우언라이에게 전화를 했다. 저우는 “마오 주석과 회의를 마치고 오는 길이다. 류샤오치 동지가 보이지 않아 의아했다”며 능청을 떨었다. 마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류샤오치였다. 중국 천지에 숨을 곳이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마오쩌둥은 당 주석 자격으로 회의를 소집했다. “공작조 파견은 엄청난 착오다. 학생운동 진압은 북양군벌이나 하던 짓이다. 공작조를 파견해 학생운동을 진압한 사람들은 말로가 좋을 수 없다.” 류샤오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우언라이는 동작이 빨랐다. 7월 27일, ‘문화대혁명 적극분자대회’를 열어 공작조 철수를 선언하며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에게 자아비판을 요구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고 “마오 주석 만세”가 장내에 진동했다. 덩샤오핑은 사색이 돼있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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