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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칼럼] 그래도 의회민주주의를 키워가자

중앙일보 2012.04.16 00:00 종합 35면 지면보기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민심이 천심이라 했다. 그러나 총선을 앞둔 지난 몇 달 혼란과 흥분으로 요동치는 민심을 지켜보면서 과연 천심이 작동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무정책, 무원칙, 무책임으로 일관된 총선 정국을 바라볼 때 어찌 이 나라의, 아니 한국 민주정치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다가 막상 나온 총선 결과를 보면서 선뜻 민심이 천심과 연계되어 작동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야(與野) 어느 쪽도 치명적 상처를 입지 않았기에 앞으로 하기에 달렸다는 분위기가 총선 결과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한때 고조되었던 민주정치 발전에 대한 낙관이 점차 식어가고 정치적 파행과 퇴행이 오히려 일상화되는 듯싶은 위기 국면에서 국민적 반성과 새 출발의 기회를 마련해준 이번 총선 결과는 정녕 천심의 작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그토록 갈망했던 민주화는 결국 독재로부터의 해방, 더 나아가 독재체제의 예방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독재자나 독재집단을 퇴출시키는 것에 비해 독재체제를 민주체제로 대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내셔널리즘을 앞세운 국가 독재나 계급을 앞세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위험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은 과거 경험에 의해 충분히 학습되었다. 그러나 다섯 대통령과 여섯 국회를 선출한 한국 민주정치 25년의 행로는 국민주권의 이념을 구현하는 의회민주주의의 제도화, 특히 의회정치의 운영에 필요한 민주적 정당제도의 확립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를 깨치지 못하고 비틀대며 걸어온 셈이다.



 이렇듯 험난한 민주정치의 제도화 과정에서 의회정치의 부진으로 국민적 실망은 쌓여만 가는 반면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을 기다리는 갈망은 높아만 가는 위험한 현상이 일상화되었다. 품위와 생산성이 함께 떨어지고 있는 국회와 정당에 대한 신뢰는 추락을 거듭했지만 반면에 강력한 행정력으로 국사를 처리할 수 있는 청와대의 권력은 계속 비대해져 왔다. 그러다 보니 우리 정치권은 그 대통령의 권력을 단숨에 독점하려는 경쟁에 모든 것을 걸고 올인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청와대의 독재’를 규탄하면서 바로 그 대통령의 권력을 장악하는 데 모든 정치활동의 초점이 집중된 지금의 상황에서는 삼권분립을 포함한 헌법규범과 문화는 그 힘이 쇠약해질 수밖에 없다. 정권 점유를 위해서는 국회의 권위쯤은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반민주적 고질병이 정치권을 휩쓸어 버렸다. 총선을 대선의 전초전으로 보는 안이하고 부당한 관행은 이쯤에서 확실하게 시정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의회 및 정당 제도를 활성화시키는 일은 19대 국회가 짊어져야 하는 중차대한 개혁과제 중에서 우선되어야 하겠다.



 한국 정치의 가장 절실한 당면과제는 우리 사회의 질적·구조적 내용이 민주화, 산업화, 세계화의 세례를 받은 후 얼마나 다원화되었는가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 다양성에 걸맞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번 총선도 우리 5000만 국민이 전통적 동질성에 못지않게 다양한 이질성을 지니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세대 간 및 지역 간에 더하여 보수와 진보,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기업과 노동계, 수도권과 지방 등이 지닌 이질성을 수용하면서 어떻게 모두가 함께 잘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 이 문제를 민주적으로 풀어가기 위해 포용의 정치, 대화의 정치, 타협의 정치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싸움의 능수(能手)보다 타협의 고수(高手)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곳이 오늘의 한국 정치, 특히 우리 국회와 정당이다. 그 자명한 이치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라고 이번 총선의 결과는 명령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갈 길이 멀다. 통일로 가는 길이 얼마나 멀고 험난할지 북한이 연일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이 먼 길을 안전하게 나아가려면 우선 우리 공동체 내부의 화합, 즉 민주적 규범의 수용과 실천을 통한 공동체의 운영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서 국민의 대표가 안정적으로 국사를 논의하고 처리하는 의회정치의 정상화가 급선무인 것이다. 국회가 정치의 중심에 자리 잡아야 민주적 정당의 발전이 가능한 것이다. 전기톱·최루탄 등이 동원되는 원시적인 여야 싸움은 더 이상 되풀이돼서는 안 되겠다. 국회 운영의 다수결 원칙과 여야합의 원칙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선하는가를 헌법적 차원의 논의를 거쳐 조속히 확정 지어야만 할 것이다. 이번 총선에 나타난 민심과 천심은 모든 정치인에게 더 이상 남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 헌법을 준수하며 국민적 화합과 타협에 앞장서라는 것이다. 그것이 의회민주주의를 키워가는 지름길이라고 국민은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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