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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유학생과 ‘反戰’ 일본사회주의자 손잡다

중앙선데이 2012.04.15 02:23 266호 26면 지면보기
니가타현의 옛 모습. 1922년 7월 니가타현을 흐르는 시나노가와 강에 한인 노동자들의 시신이 떠내려오면서 한·일 양국의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했다. [사진가 권태균]
1922년 7월 일본 니가타(新潟)현과 나가노(長野)현을 흐르는 전장 367㎞에 이르는 시나노가와(信濃川)강 상류에서 시신이 차례로 떠내려 왔다. 강 상류에 있는 신에쓰(信越)전력주식회사에서 건설 중인 니가타현 수력발전소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한인(韓人) 노동자들의 시신이었다. 1922년 7월 29일자 요미우리(讀賣)신문의 보도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1200여 명의 공사현장 노동자 중 반수 이상이 한인들로서 건설청부업자에게 가혹행위를 당하고 살해당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재일 한인 유학생들의 분노를 사면서 이들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들이 결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 ③ 일본유학생과 북풍회

나경석(오른쪽 둘째)은 한인노동자학살사건의 조사위원이자 나혜석(왼쪽 첫째)의 오빠였다. 나혜석의 남편 김우영(왼쪽 둘째)은 친일관료였다. 앞줄 가운데는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
도쿄 유학생들은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羅景錫)과 김약수(金若水)를 사건 조사위원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국내에서 급파된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상협(李相協)과 함께 현지로 갔다. 그런데 요미우리 특파원이 조선인에게는 말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 것처럼 일본인들은 이 사건이 한국의 독립 시위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공산당 기관지 ‘전위(前衛)’ 1922년 9월호가 ‘일선(日鮮:일본과 조선) 노동자의 단결’이란 논문을 게재해 한인 노동자를 적극 옹호하면서 한인 유학생들의 마음을 샀다. 이 논문은 ‘일본 노동자와 조선 노동자의 제휴’를 주장하고 ‘조선인 노동자의 조합 결성’과 ‘조선인에게만 가해지는 특수 대우를 철폐하고 동일 노동에는 동일한 임금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9월 7일에는 도쿄 간다(神田)의 ‘그리스도 교육청년회관’에서 ‘신농천(信濃川) 조선노동자 학살사건 조사회’가 주최하는 ‘신농천 학살사건 대연설회’가 열렸다. 일본공산당사 연구가인 이누마루 기이치(犬丸義一) 교수는 “진보적인 재일 조선인들이 이 운동 후에 북성회(北星會)를 결성해 일본의 공산주의자들과 공동으로 행동했다(日本共産黨の創立)’고 분석했다. 이 사건이 한·일 사회주의자들을 연대하게 했고 그 결과물로 북성회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1923년 1월 도쿄에서 김약수·송봉우(宋奉瑀)·이여성(李如星) 등 재일 유학생 60여 명이 조직한 북성회는 결성 당시부터 일본인 사회주의자들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북성회가 1923년 여름방학 때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을 국내로 초청해 순회 강연회를 열기로 한 것은 이런 인맥을 활용한 것이었다. 이때 북성회가 교섭한 강사가 와세다대학 강사이자 일본공산당 창립 멤버였던 사노 마나부(佐野學)였다. 동아일보(1923년 7월 24일)는 “요전 주의자(主義者) 검거사건으로 사노 마나부는 행방불명이 되어 후세 다쓰지(布施辰治·변호사) 등이 대신 오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후세 다쓰지. 한인 관련 사건의 단골 변호사였다.
일본공산당은 1922년 7월 15일 창당되었지만 1년도 채 안 되는 1923년 6월 5일 80여 명의 일본 공산당원이 대거 투옥되는 제1차 공산당 사건으로 붕괴한다. 이때 미리 낌새를 채고 사노(佐野), 다카(高津), 곤도(近藤) 등 5명의 간부가 중국으로 망명한 것이 행방불명으로 보도된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 공산주의 운동사에는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일본공산당 중앙위원이 되는 곤도 에이조(近藤榮藏)는 코민테른 밀사-일본공산당 창생비화(創生秘話), 1949)에서 1920년 이동휘가 상해에서 파견한 이증림(李增林)을 만났다고 전하고 있다. 1920년 7월 이동휘가 도쿄에 파견한 이춘숙(李春塾)은 메이지대학에 재학 중인 이증림을 만났고 그의 소개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衫榮)를 만났다. 아직도 일부 일본인 연구자들은 이동휘가 일본공산당 창당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꺼려 ‘코민테른 밀사’라는 모호한 표현을 쓰지만 코민테른의 밀사가 아니라 한인사회당의 밀사였다. 이동휘는 레닌 자금 일부를 오스기 사카에에게 지원하면서 일본공산당을 만들라고 권했지만 오스기가 아나키즘을 포기하지 않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그러자 이증림은 곤도 에이조를 대동하고 상해로 가서 이동휘를 만나게 했다. 이동휘는 곤도에게 6300엔의 거금을 지원했다. 하지만 곤도는 시모노세키에서 도쿄행 급행열차를 두 번이나 놓쳐가면서 유흥에 빠졌다가 경찰에 체포되는 ‘시모노세키 유흥사건(下關遊興事件)’을 일으켰다.

그러나 곤도는 결국 이동휘의 지원 자금을 가지고 와세다대학의 사상 서클을 중심으로 효민공산당(曉民共産黨)을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효민공산당은 1921년 11월 육군대연습일(陸軍大練習日)에 ‘공산당본부(共産<515A>本部)’ 명의의 반전(反戰)·반군(反軍) 유인물을 군인기숙사에 뿌린 ‘효민공산당 사건’으로 붕괴되고, 1922년 7월 다시 결성되는 것이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1871~1933)가 중앙위원회 위원장인 일본공산당이었다.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곤도 에이조 등이 중앙위원이었는데 사카이 도시히코는 1908년의 적기사건(赤旗事件)으로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등과 투옥된다. 그 바람에 1910년 말의 대역(大逆)사건으로 고토쿠 슈스이 등 12명의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들이 사형당할 때 도시히코는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절망을 넘어서⑦양국의 우울한 기운 참조>

일본공산당의 현안은 천황제 문제였다. 비밀결사 결성으로 잡히면 치안경찰법 위반으로 1년 정도 형을 살지만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다간 사형이었다. 1923년 2월 지바(千葉)현 시천(市川)시의 석신정(石神井)이란 음식점에서 제2회 당 대회가 열리는데, 이때 회의록을 작성했던 다카세 기요시(高瀨淸)도 그해 6월의 제1차 공산당 사건 때 검거되었다. 다카세는 감옥에서 회의록에 천황제 문제를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당수 사카이를 비롯해서 스물 몇 명의 생명을 구제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그날 밤 처음으로 잠을 푹 잘 수 있었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일본공산청년동맹 위원장 가와이 요시토라(川合義虎)와 작가 겸 노동운동가 히라사와 게이시치(平澤計七) 등 10여 명이 경찰서로 끌려가 학살당하는 가메(龜戶)사건이 발생했다. 일본공산당원들은 이때 공산당 사건으로 투옥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안도했을 정도로 군국(軍國) 일본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한국의 독립운동과 비슷한 수준의 탄압을 받았다. 이 때문에 진보적인 한인 유학생들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들의 연대가 자연스러웠다.

재일유학생들은 1922년 11월 오사카(大阪)와 도쿄에서 각각 조선인노동자동맹회를 결성했다. 그러자 일본공산당 계열의 총동맹(總同盟)은 1923년 메이데이(5월 1일) 때 ‘식민지 해방’을 주장한 데 이어 8월 중앙위원회에서 ‘식민지 인민의 무산계급 운동의 촉진을 위해 노력한다’고 지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조직된 북성회 강연단은 1923년 7월 30일 서울에 도착해서 다음 날부터 서울을 필두로 평양·개성·대구·진주·김해·부산 등지에서 강연회를 개최했다.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북성회 강연회 때 시국사건 변호사 후세 다쓰지와 북성회원 김종범이 나란히 강연했다. 순회강연회 등으로 존재를 과시한 북성회는 1924년 11월 25일 재동(齋洞) 해방운동사(解放運動社)에서 사상단체 북풍회(北風會)를 결성했다.

조선총독부 법무국(法務局)에서 발간한 조선독립사상운동의 변천(1931)은 “북풍이 한 번 불면 빈대나 모든 기생충이 날아가 버린다”는 속언에서 딴 이름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북쪽 러시아에서 불어오는 혁명의 바람’이란 뜻도 내포되어 있었다. 북풍회는 서무, 조직, 지방, 조사, 교양, 편집부 등 여섯 부를 둔 준 정당조직으로서 송봉우(宋奉瑀), 김약수, 서정희(徐廷禧), 정운해(鄭雲海), 김종범(金鍾範), 마명(馬鳴), 김장현(金章鉉) 등이 집행위원이었다. 북풍회는 당면 목표를 ‘마르크스 사상의 보급과 무산(無産)대중을 일개(一個)의 능동적 계급으로 조직하는 것’으로 설정했는데, 1924년 11월 27일 집행위원회를 열어 강령과 선언서를 작성했다. 북풍회는 강령에서 ‘사회운동은 본질적으로 무산대중 자체의 운동’이라고 선언했다.

중요한 것은 민족주의에 대한 태도였다. 북풍회는 “우리는 계급관계를 무시한 단순한 민족운동을 부인한다”고 전제했지만 “우리는 특히 양대(兩大)운동, 즉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의 병행에 대한 시기적 협동을 기한다”라며 민족주의와 제휴를 선언했다. 북풍회는 1924년 12월 ‘한국과 일본의 무산계급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지 않고서는 한국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정도로 무산계급의 한·일 공조를 중시했다.

같은 달 장곡천정(長谷川町:현재 중구 소공동) 공회당에서 열린 북풍회 정견발표 강연회 때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신철(辛鐵)이 연사로 등장했다. 신철과 북풍회의 결합은 이듬해 조선공산당 창당이라는 의미심장한 결과를 가져온다. 이렇게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1920년대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한 축인 북풍회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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