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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살아 있다면

중앙선데이 2012.04.15 01:54 266호 2면 지면보기
미 대륙 중부에 위치한 아칸소 주지사 빌 클린턴이 40대 중반의 나이에 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하겠다고 했을 때 공화당 지지자들은 웃었다. 상대는 현직 대통령 조지 H 부시. 1991년 봄 ‘사막의 폭풍’ 작전으로 이라크의 항복을 받아내 인기가 90%까지 치솟은 막강한 대통령이었다. 클린턴은 어디를 두드려야 하는지 알았다. 91년 10월 3일, 그는 모교인 조지타운대학에서 ‘새로운 약속(The New Covenant)’을 발표했다. 자신의 집권 플랜이었다. 이번엔 민주당 지지자들이 기겁했다. 그의 약속은 그동안 민주당이 펼쳐 온 공약들과는 딴판이었다. 세금은 많이 걷고, 복지는 확대하고, 기업은 견제하고, 정부 역할은 키우고, 범죄에 대해선 관대한 게 그간의 민주당이었다. 클린턴은 반대로 갔다. 세금은 줄이고, 기업의 자유는 확대하고, 당장의 복지보다 교육을 제공하고, 정부 사이즈는 줄이고, 범죄에는 강력히 대처하겠다는 거였다. 그의 주장은 한마디로 ‘당과 상관없이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정책을 선택하겠다’는 거였다.

김종혁의 세상탐사

그로부터 6년 뒤인 97년 영국과 한국에서 두 명의 정치인이 그의 정책을 벤치마킹했다. 노동당 당수였던 44살의 토니 블레어. 그 역시 클린턴처럼 보수당의 정책을 대폭 수용했다. 경제적으론 성장을 중시하는 보수당 정책을 받아들이면서 기존의 진보정책은 사회적 가치를 통해 구현해 간다는 거였다. 좀 민망했던지 멋진 이름을 붙였다. 제3의 길(The 3rd Way). 한국에선 블레어의 아버지뻘인 74살의 김대중(DJ) 야당 후보가 연말 대선을 앞두고 똑같은 전략을 폈다. 그는 과격 학생운동 단체인 한총련의 해체를 주장했고, 국방비 증액을 촉구하고, 한·미 공조를 강화하자고 했고, 노동자들의 무분별한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해 달라고 호소했다. 두 사람 다 집권에 성공했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무려 10년간 집권했다.

선거철이 되면 각 후보와 정당들은 어떻게 하면 유권자에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일까 고민한다. 그게 정상이다. 하지만 이번 4·11 총선에선 그런 등식이 완전히 깨졌다. 최소한 민주통합당은 그랬다. 새누리당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야당의 복지 정책을 일부 수용하면서 재빨리 오른쪽에서 중간으로 이동해 갔다. 하지만 민주통합당은 점점 더 왼쪽으로 갔다. 나중엔 도대체 정체성이 뭔지 뒤죽박죽인 상황까지 갔다. 자기 나라 군대를 ‘해적’이라고 불러도 모른 척하고, 여성과 노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비하를 일삼는 B급 인사들의 눈치를 보며 절절 맸다.

만일 김대중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살아 있었어도 민주당은 과연 저랬을까? 이번 선거를 보며 그런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있었다면 그의 참모였던 유시민 통합진보당 대표가 과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제주 해군기지에 대해 저렇게 안면을 몰수하고 딴소리를 할 수 있었을까. 김대중 대통령은 과연 한명숙 대표가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한·미FTA를 폐기하라고 편지를 전달하는 걸 용납했을까. 그 두 전직 대통령은 민주당이 ‘나꼼수’의 눈치를 보며 질질 끌려다니는 걸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을 것 같다.

적어도 DJ는 외교가 뭔지 아는 대통령이었다. 중국과 러시아·일본이라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한민족이 살아남고, 통일을 이루고, 경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아는 정치인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니지 당장의 표에 눈이 멀어 말장난이나 하는 부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두 분의 대통령은 물론 집권기간 동안 잘못한 것도 많다. 하지만 요즘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사람들, 그러니까 DJ와 노무현 덕분에 정치판에서 자리 잡아 여기까지 온 분들이 하는 행태를 보노라면 “서거한 두 대통령이 땅을 치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총선은 보여준 게 있다. 야당이 입만 열면 떠드는 ‘심판’의 대상은 현직 대통령과 여당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기야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염치와 양심은 여당 따로, 야당 따로가 없질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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