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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발령에, 단순 업무에 … 즐겁게 잘할 일 찾아

중앙선데이 2012.04.15 01:41 266호 10면 지면보기
지난해 7월부터 H대기업 서울 본사 관리부서에서 일해 온 김모(27)씨는 1년도 안 된 이달 초 회사를 그만뒀다. 고려대를 나와 친구들의 부러움 속에 들어간 회사였다. 결정적 계기는 충북 지역 근무 발령이었다. 채용 공고에 ‘지방에 배치할 수도’란 문구가 있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갈 줄은 몰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서울을 떠난 적이 없는데 갑자기 지방 갈 생각을 하니 답답했다”고 털어놨다.

대기업 들어간 신입사원 퇴사 증가, 왜?

서울대 출신의 최환기(28)씨는 굴지의 종합상사에서 1년여 근무하다 올 초 사표를 냈다. “기대에 비해 대부분 업무가 단순ㆍ반복적이라 보람을 찾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조직의 틀에 꽉 얽매여 지낼 5~10년 뒤의 자화상이 그려졌다”고도 했다. 그는 서울 시내에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차렸다. “내 사업을 키워보겠다는 꿈을 품으니 큰 회사에 들어가 넥타이 매고 봉급쟁이 생활은 다시 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백 대 1의 ‘민간 고시’를 뚫고 대기업에 ‘입성’한 직장 새내기들이 한두 해 넘기지 못하고 중도 하차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교육과 스펙에 찌든 유약한 모범생들이 조직의 무게와 치열한 생존경쟁을 견디지 못한 탓일까, 아니면 번듯한 대기업조차 젊은 인재들의 꿈을 길러줄 넉넉한 직장이 되지 못하기 때문일까. 기업들도 열심히 좋은 사람 뽑아놓으면 금세 사표를 내던지는 경우가 늘면서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본지가 삼성·현대·SK·LG 등 10대 기업집단의 간판기업 10곳을 조사한 결과, 대졸 신입사원들이 1년 안에 그만 두는 비율이 9%에 이른 곳이 있었다. 이들 10개 기업의 3년 내 퇴사율은 절반가량이 10% 언저리였고 20% 넘는 곳도 있었다. 조사 대상 기업은 그래도 일류 기업들이라 퇴사율이 낮은 편이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406개 기업을 상대로 조사한 보고서를 보면 2009년 입사자의 1년 내 조기 퇴사율은 평균 19.9%에 달했다. 물론 이직률이 높은 중소기업이 39.6%로 평균치를 많이 끌어올렸지만 대기업도 13.9%로 만만찮았다.

바늘구멍 같은 대기업 관문을 뚫고 들어간 젊은이들이 금세 그만두는 까닭은 뭘까. 취재차 접촉한 퇴사자들은 “회사와 맞지 않는다” “관료적 분위기가 싫었다” “공부를 더하고 싶다” 는 등의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인사 담당자들은 주로 인내심과 적응력 부족을 꼽았다. 뽑고 뽑히는 입장에 따라 시각 차이가 있겠지만 공통분모는 있었다. 요즘 젊은 신입사원들의 정서와 대기업 조직문화의 부조화다.

전자업종 대기업을 2년 다니다 이달 초 그만둔 이모(27)씨는 “일이 너무 고됐다”고 했다. 서울 신촌 자택에서 경기 수원의 직장까지 출근하려면 아침 6시20분에 집을 나서야 했다. 거의 매일 오후 10시 넘게까지 야근을 했다. “결정적 계기는 없었지만 스트레스와 피로가 꾸준히 쌓였어요. 승진하려면 가정을 버려야 하고, 하나만큼 일하면 상사에게 둘만큼 일한 듯 보여주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선배 사원의 말에 가슴이 콱 막히더군요.”

새로운 꿈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대형 시중은행에 지난해 입사했다가 연초 그만둔 박의상(29)씨는 “회사도 좋고 선배도 따듯했지만 계속 은행에 다니면 사는 게 단조로워질 것 같았다. 내가 즐겁게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더 찾아보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퇴사 후 대학원에 진학했다. 충북 발령을 계기로 그만둔 김씨는 “지방 근무도 내키지 않았지만 실은 조직의 위계질서가 너무 강하다는 느낌에 늘 거북했다”고 말했다.

네이버 취업 카페 ‘독하게 취업하는 사람들’의 한 회원(아이디 hankuk21)은 “대기업에 취직했다가 스트레스가 너무 커 나왔다. 그 회사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분들께 죄송하다”고 올렸다.

‘부자아빠’의 존재도 젊은이들을 유약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서울대 서이종(사회학) 교수는 “요즘은 대학 나와 취업이 늦어지는 자녀를 부모가 계속 부양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직장이 조금만 힘들어도 내던지곤 한다”고 말했다. 중앙대 정연앙(경영학) 교수는 “자유분방한 젊은 세대는 자신을 조직에 맞추려는 습성이 약하다. 또 인터넷ㆍ스마트폰에 익숙해 직장생활의 오프라인 대면 소통에 서투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만둔 젊은이들은 대학원 진학이나 전문 자격증 취득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로스쿨 준비학원인 일등로스쿨 관계자는 “주말반에 젊은 대기업 직장인이 적지 않다. 그러다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여겨 회사를 아예 그만두고 평일반으로 돌리는 경우도 꽤 있다”고 전했다.

조사 대상 10개 대기업 인사 담당자들이 보는 ‘금세 그만둘 신입사원’은 어떤 유형일까. 적응력과 인내심 부족을 지적한다. LG화학의 이맹준 인사기획팀장은 “객관적으로 뛰어난 청년 중 직장 현실에 실망해 그만두는 경우가 꽤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인내심 부족(현대중공업) ▶처음부터 큰 성과를 내겠다는 욕심(대한항공) ▶강한 자기계발 욕구(SK텔레콤) ▶협업·분업 경험 부족(롯데쇼핑) ▶조직 분위기 적응 곤란(포스코) 등을 꼽았다.

금융회사 인사 담당 김모 팀장은 “대기업 합격자는 웬만한 다른 직장에 붙을 수 있는 인재다. 갈수록 신입사원들이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쉽사리 박차고 나간다”고 말했다. 그는 “재작년에는 입사 1년 내 퇴직률이 18%에 달해 인력을 재충원하느라 엄청 고생했다”고 했다. GS칼텍스 관계자는 “로스쿨이나 대학원에서 공부 더하겠다고 그만뒀다가 뜻대로 안 돼 재입사할 수 없느냐고 연락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전했다.

인사 담당자들은 금방 그만둘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아무리 훌륭한 인재라도 기피한다. 기업에 금전적 손실은 물론 조직 분위기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대한상의 작년 보고서를 보면 대기업이 신입 직원 한 명을 뽑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189만원이고, 교육ㆍ연수 등 초기 훈련 비용은 375만원으로 집계됐다. 뽑은 후에는 멘토(후견인) 제도나 집체 교육ㆍ연수 등을 통해 애사심을 고취한다. 대한항공은 멘토링 제도와 함께 입사 1년이 되면 해외봉사활동 등 단기 재충전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롯데쇼핑은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멘토 제도와 함께 분기별 입사 동기 모임 행사를 한다. 삼성전자ㆍ현대자동차 등 대부분의 기업이 멘토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취업포털 인크루트의 이광석 대표는 “신입사원의 조기퇴직은 일단 걸리는 데 들어가고 보자는 ‘묻지 마 지원’도 일조한다. 어떤 업종에서 무슨 일을 할지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도 사회 초년생의 마음을 보듬는 다양한 인력 운용 제도를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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