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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많은 한국인이라 한밤에도 무료 통역봉사 하죠”

중앙선데이 2012.04.15 01:37 266호 12면 지면보기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바벨탑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의 언어는 원래 하나였다. 그런데 인간들이 거대한 탑을 쌓으려고 하자 이를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신이 분노해 언어를 여러 개로 나누는 벌을 내린다. 말이 통하지 않게 된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결국 탑을 쌓는 데 실패한다. 휴대전화 통역봉사단체인 ‘bbb(Before Babel Brigade)’의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bbb는 인류의 언어가 하나였던 ‘바벨탑 이전’을 지향하는 민간 자원봉사 서비스다. bbb를 통하면 전 세계인이 소통의 장벽을 거뜬히 넘을 수 있다는 취지다.

10주년 맞은 통역의 119 ‘bbb’ 유장희 회장

bbb는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대표번호(1588-5644)로 전화를 걸면 해당 언어 자원봉사자의 휴대전화로 24시간 연결 가능한 시스템이다. 해외에 나간 한국인도 로밍서비스를 통해 이용할 수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시작됐다. 당시 월드컵 경기 전후 두 달에 걸쳐 2만5000여 건의 통역 서비스를 했다. 현재 18개 언어, 4200여 명의 봉사자가 월 5000건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25일로 창립 10주년을 맞는 bbb 유장희(71·사진) 회장을 만났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이화여대 부총장 등을 역임한 그는 창립 때부터 이사로 일해오다 이제훈 전 중앙일보 사장의 뒤를 이어 2010년 회장 직을 맡았다. 그 역시 bbb 영어 자원봉사자다.

-지난해 6만 건을 비롯해 10년간 통역 서비스 누적 건수가 27만 건이다. 모델로 삼았던 국내외 사례가 있나.
“전혀 없다. bbb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 모델이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제안을 했다. ‘그동안 세계시장을 개척한다고 사람들이 해외 지사·상사에 많이 나갔고 전직 외교관, 유학 경험자들이 있으니 외국어 구사인력이 꽤 될 거다. 이 사람들을 한국에 오는 외국인들과 전화로 연결해주자’는 거였다. 설마 했는데 모집공고를 내고 우리도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말 그대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전직 외교관, 무역회사 직원, 은행원, 교사…시험을 거쳐 2500명을 선발했다. 지금도 봉사하겠다는 사람이 계속 문의를 해오는데, 원하는 사람을 다 뽑을 수가 없다. 시험에 떨어지면 공부 더 해서 다시 치르겠다는 사람도 있다. 평균 경쟁률이 3대 1 정도다.”

-봉사자는 어떤 사람들이고 어떻게 선발하나.
“남녀 비율은 42%와 58%로 여성이 약간 많다. 해외 생활 경험이 있는 사람이 70%가량이다. 연령대로 보면 20, 30대가 60% 이상이다. 60대부터 80대도 적지만 있다. 2002년부터 10년간 꾸준히 봉사해온 분들이 900여 명이나 된다. 그중엔 전직 외교관도 7명 있다. 김영식 전 코스타리카 대사, 주진엽 전 멕시코 대사 등이다. 이지철 전 고베 총영사는 84세인데 아직도 봉사를 한다. 선발은 전화 인터뷰로 한다. 한국외국어대 등 언어 관련학과 교수들이 언어별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데, 그분들이 일일이 인터뷰를 한다. 선발 후엔 사이버교재로 교육을 한다.”

-bbb의 별명이 ‘통역의 119’다. 24시간 무료 봉사가 봉사자 입장에선 쉽지 않을 텐데.
“봉사하겠다는 마음가짐이 갖춰지지 않으면 참 어려운 일이다. 자다가도, 퇴근 후 회식 중에도, 휴가 중에도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전화를 받아야 하니까. 게다가 무보수다. 그런데도 다들 자신의 재능이 나라를 위해 활용된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인상적이었다. 외국인을 도와주다 보니 언어 통역이 아니라 문화 통역을 하게 됐다는 반응이 많다. 사장될 뻔 했던 외국어 실력을 bbb 덕분에 유지·향상시켰다는 얘기도 들었다. 언어 실력이 꽤 돼야 봉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도 영어 자원봉사를 하는데, 밤중에 자다 전화를 받은 적이 여러 번이다. 출입국관리소나 경찰서, 병원에서 전화가 많이 온다. 특히 병원에서 오는 전화는 어려운 의학용어가 많아서 긴장이 된다. 한 달 전엔 폐렴에 걸려 고열이 난 상태로 병원 응급실에 온 미국인 남성을 도운 적이 있다. 해열제 주사를 맞고 입원하는 과정에서 간호사와 말이 통하지 않아 오해가 생겼다. 우리가 도와주니 문제가 금세 풀렸다. 잠을 설치긴 했어도 그럴 땐 보람이 참 크다. 관광객의 분실물을 찾아주는 소소한 도움부터 고용주와 외국인 노동자의 갈등을 통역해주는 것까지 bbb의 손길은 두루 뻗치고 있다.”

-해외에서 배우겠다고 할 만한 모범사례다.
“안 그래도 지난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정부에서 파견한 민간단체가 다녀갔다. 브라질은 2014년 월드컵, 2016년 올림픽 등을 앞두고 있어서 언어봉사 서비스에 관심이 크다. ‘브라질판 bbb’를 만들겠다고 소프트웨어부터 올해 개발된 스마트폰용 앱까지 모든 걸 배워갔다. 그들이 가장 궁금해한 것 중 하나가 ‘무료봉사인데 한국엔 자원자들이 많으냐’라는 거였다. 4000명 넘게 활동하고 있다니까 ‘우리도 과연 그렇게 모일까’라며 자신 없어 하더라. 최근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방한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한테서도 자료를 요청받았다. 한국만의 독창적인 자원봉사 모델이자 전 세계가 소통할 수 있는 문화서비스 상품이라는 데 반 총장도 주목한 것 같다.”

-한국에서 bbb 운동이 성공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이어령 전 장관이 제안할 때 ‘한국 사람들은 정(情)이 있는 민족이라 잘될 거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을 했고, 태안반도 기름 유출 때 다들 복구작업을 도왔던 기억이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의명분이 훌륭하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하면 발벗고 나선다. 옳은 일, 좋은 일을 위해선 내가 좀 희생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있다. 한밤중에 전화벨이 울리면 솔직히 귀찮은 생각도 들지만 사명감 때문에 받지 않을 수가 없다.”

-4200명 중 10년 봉사자도 900명이 넘는다.
“다들 열의가 대단하다. 요새 재능 나눔, 지식 나눔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bbb야말로 대표적인 사례다.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을 자꾸 발굴해서 써야 한다. 특히 소수 언어권 전공자들에겐 참 좋은 기회다. 가령 아랍인들은 한국에 아랍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이렇게 많으냐며 놀라워한다. 향후 20개 언어, 5000명까지 늘려나가는 게 목표다.”

-도움을 받은 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될 것 같은데.
“이배용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은 ‘bbb야말로 국격(國格)을 높이는 결정적인 서비스’라고 말한다. 2002년 월드컵을 한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했는데 FIFA 내부에서 한국이 더 잘했다는 의견이 많았단 얘길 들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언어 불편을 많이 못 느꼈다는 거였다. bbb가 거기에 한몫한 것 같아 기뻤다. 1988년에 올림픽을 하긴 했지만 그동안 한국 하면 외국인 입장에선 ‘말 안 통하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bbb로 인해 ‘대화 되는 나라’라는 이미지가 생겼다면 이런 게 국격을 높이는 일 아니겠는가. 다만 예산(1년 8억원, 이 중 50%를 문화관광부에서 지원)이 많지 않다 보니 대대적으로 홍보를 못해 인지도가 아직 높지 않은 점이 안타깝다. 특히 해외에 나가서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한국에 온 외국인 중 bbb 봉사자도 생겼다던데.
“총 39명이 활동 중이다. 중국어·일본어·베트남어·영어 등이다. 몽골어가 10명으로 가장 많다. 대개 결혼이민자들인데 모국어와 한국어 모두 능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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