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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사회주의자 … 파시즘·인종차별·불평등에 반대

중앙선데이 2012.04.15 00:58 266호 25면 지면보기
헬렌 켈러는 미국 앨라배마주에 있는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 전 세계 장애인의 교육과 권익을 위해 평생 헌신했다.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은 이런 말을 남겼다. “19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두 명의 인물은 나폴레옹과 헬렌 켈러다. 나폴레옹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다 실패했다. 헬렌 켈러는 세계를 마음의 힘으로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1874~1965)은 저술가·사회운동가인 켈러를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여성”이라고 칭송했다.

새 시대를 연 거목들 <10> 헬렌 켈러

헬렌 켈러(1880~1968)는 청각·시각 장애인이었다. 그는 이중 장애를 극복했다. 폭스트롯·왈츠 같은 사교춤을 배우고 말 타기도 배웠다. 그리스어·라틴어·프랑스어·독일어를 습득했다. 다른 수험생들과 동일한 시험 문제를 풀고 명문 래드클리프대에 1900년 입학했다(래드클리프대는 1999년 하버드대에 흡수됐다). 독문학과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1904년 우등급(cum laude)으로 졸업했다. 시각·청각 장애인 중 최초의 대학 졸업자가 된 것이다.

휴가 나온 켈러와 스승 앤 설리번(1888년)
모든 역경 극복하는 미국 정신의 상징
졸업 후 헬렌 켈러는 장애인들을 위해 삶을 바쳤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은 죽음과 같은 암울한 시대였다. 켈러는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13권의 책을 저술했다. 교회, 유대교 회당, 타운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 교육·취업과 같은 분야에서 장애인들에게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제공할 것을 호소했다. 1921년 창립된 미국맹인재단(AFB)을 위해 40여 년간 모금 활동을 했다. 그가 호소하면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1835~1919)와 같은 부호들이 지갑을 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대중의 독서 취향이 바뀌어 그의 인세 수입이 줄었다. 겸사겸사 켈러는 1920~24년 일종의 유랑극단인 보드빌(vaudeville) 공연에 나섰다. 공연으로 자신이 장애를 극복한 과정을 대중에게 보여주며 장애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꾸려고 했다. 1930년대에는 세계 40개국에서 강연 활동을 펼쳤다. 강연·모금 활동은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1962년까지 계속됐다.

헬렌 켈러는 장애의 유무를 떠나 모든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이 됐다. 대외적으로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미국의 정신을 상징했다. 그는 10세 때 이미 전국적인 저명인사였다. 미국 대통령 일곱 명이 그를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1964년에는 미국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미국자유훈장을 받았다. 하버드대는 1955년 그에게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켈러는 하버드대가 명예학위를 수여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켈러가 날 때부터 장애인은 아니었다. 어머니·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리와(Come here)” 정도의 명령은 알아듣는 생후 19개월이 되던 때에 시각·청각을 상실했다. 성홍열, 척수막염 혹은 풍진으로 추정되는 심한 병을 앓고 난 다음이다. 켈러는 1887년 가정교사로 입주한 앤 설리번(1866~1936)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야수 같았다. 보스턴에 있는 퍼킨스 맹인학교를 졸업한 설리번은 1887년 3월 2일부터 켈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20세였던 설리번은 5세 때 트라코마로 부분적으로 실명했으며, 평생 시력이 악화·호전을 오가다 말년에는 결국 실명했다.

켈러의 반항으로 설리번 선생님은 치아 두 개가 부러지기도 했다. 설리번은 켈러의 손바닥에 물을 흘리며 “W-A-T-E-R”라고 썼다. 세상 만물에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켈러가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헬렌 켈러는 수화를 배우지 않았다. 1888년에는 점자, 10세 때인 1890년부터는 말하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뭔가를 써주면 말로 답변하는 게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었다. 켈러가 하는 말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의 영어는 강한 외국어 억양으로 말하는 영어 같았다.

노예제 왜곡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비판
세상은 헬렌 켈러를 혹독하게 검증했다. 켈러의 엄청난 기억력이 화를 부르기도 했다. 그는 몇 주 전에 집필한 것도 생생히 기억했다. 잠재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내용을 서리왕(The Frost King)(1892년)이라는 동화로 발표하는 바람에 표절 시비가 붙었다. 적대적인 사람들은 그를 ‘살아 있는 거짓말’이라고 불렀다. 켈러가 애초에 장애인이 아니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펴는 사람들까지 나왔다.

칼끝은 설리번까지 겨냥했다. 사실 설리번은 성미가 까다롭고 질투심·소유욕이 강했다. 문제는 켈러의 집필에서 설리번이 차지하는 비중이었다. 시각·청각 장애인들까지 들고일어나 켈러의 저술에 나오는 색상, 빛, 소리에 대한 내용에 의문점을 제기했다. 장애가 없는 사람이 글을 써도 편집자(editor)의 손을 거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회의론자들은 설리번이 켈러의 글을 검열했을 뿐만 아니라 창작에도 깊숙이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독창성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에게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관찰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한다” “시각 장애는 정신적인 비전을 제한하지 못한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켈러는 ‘천사’였다. 천사 이미지는 윌리엄 깁슨의 연극 ‘기적을 일으킨 사람(The Miracle Worker)’(1959)과 동명의 영화(1962)로 각인됐다.

천사 이미지로 감춰지다시피 한 게 두 가지 있다. 켈러가 사회운동가였다는 것과 여느 여성처럼 남성의 사랑을 갈구했다는 것이다. 헬렌 켈러는 여성 참정권, 피임에 찬성하고 파시즘, 전쟁, 인종차별, 불평등, 가난에 반대한 사회운동가였다. 켈러는 마거릿 미첼(1900~49)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를 비판하기도 했다. 작품에 남부 노예제의 실상이 잘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헬렌 켈러는 사회주의자였다. 독서를 통해 사회주의자가 됐다. 1909년 사회당에 가입했다. 독일어 점자로 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물을 읽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헬렌 켈러의 활동을 ‘사찰’했다. 켈러는 1917년 러시아혁명에 열광했으며 미국 사회주의 운동이 점진주의와 혁명주의 진영으로 분열하자 혁명주의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켈러는 미국의 민주주의도 믿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민주주의는 이름뿐이다. 우리가 투표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실상 두 편으로 나뉜 독재자들 중에서 한편을 선택한다는 뜻이다.” 1921년 이후에는 켈러의 사회주의 활동이 대폭 감소했다. 장애인들을 위한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빨간 하이힐과 밍크코트, 마티니 즐겨
헬렌 켈러의 모습은 상당히 관능적이었다. 1920년께 유리 안구를 이식했다. 사람들은 그의 파란 눈에 매혹됐다. 켈러는 자신의 성욕을 감추지 않았다. 이렇게 말했다. “젊은 남자들의 냄새에는 불·폭풍·바다와 마찬가지로 뭔가 본질적인 게 있다.” 켈러는 “볼 수 있다면 우선 결혼하고 싶다”는 말도 남겼다.

36세였던 1916년에는 비서인 피터 페이건과 야반도주할 생각을 했다. 사회주의자인 페이건은 당시 29세였다. 켈러와 페이건의 구상이 신문에 나는 바람에 어머니가 알게 됐다. 어머니는 페이건을 쫓아냈다. 당시 미국의 뉴잉글랜드와 남부는 빅토리아 시대(1837~1901)의 영국 가치관이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여성이 할 일은 출산과 육아였다. 남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청각·시각 장애인인 켈러가 결혼하는 것을 사회 통념이 용인하지 않았다. 게다가 켈러는 장애인들의 성녀(聖女) 역할을 해야 했다. 켈러가 50대였을 때 캔자스시티에 사는 홀아비가 서신으로 구애했다. 서신이 오갔지만 켈러는 결국 거절했다.

마크 트웨인은 “헬렌 켈러는 앞으로 1000년 동안은 오늘만큼 유명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켈러는 사후에 차츰 잊혀져 갔다. 1980년대 중반부터 교과서나 권장독서 목록에서 사라졌다. 문화다원주의의 결과로 미국 사회에서 ‘죽은 백인 남성들(dead white men)’의 위상은 급락했다.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의 역사와 인물들을 비중 있게 다루려면 어쩔 수 없었다. 문화다원주의는 ‘죽은 백인 여성’인 헬렌 켈러에게도 타격을 입혔다. 권장도서였던 내 인생 이야기(The Story of My Life)(1903)는 문체가 화려하지만 신세대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대신 ‘헬렌 켈러 조크(Helen Keller jokes)’라 불리는 얼토당토않은 우스갯소리가 오늘날 인터넷 공간에서 수만 건이 검색된다. 이런 것들이다. “헬렌 켈러는 남편을 어떻게 만났을까?” “블라인드데이트(blind date)로 만났다.”

보람도 있고 명성도 있는 삶을 살았지만 헬렌 켈러는 고독했다. 40대 말에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에서 위안을 얻는다”는 말도 남겼다. 그는 빨간색 하이힐을 신고, 밍크코트를 입는 것을 좋아했다. 말년에 헬렌 켈러는 의사의 권고에 따르지 않고 마티니를 즐겼다. 켈러는 1936년 사망한 설리번보다 30여 년을 더 살았다. 둘은 14살 차이였다. 켈러는 1968년 수면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워싱턴 DC에 있는 내셔널대성당(성공회)에서 그의 서거를 애도하는 행사가 열렸다.

켈러는 별세하기 얼마 전 유언처럼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믿는다. 하느님은 내 인생을 어둠과 침묵의 세월 속에서 내가 모르는 목적을 위해 사용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하느님의 목적을 나는 이해할 것이며 나는 만족할 것이다.” 헬렌 켈러는 삼위일체 정통파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는 에마누엘 스베덴보리(1688~1772)의 추종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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