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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시도할 수 있게 딱 그만큼만 튄다

중앙선데이 2012.04.14 01:53 266호 31면 지면보기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옆 골목에 있는 ‘명호빌딩’. 다소 촌스러운 외관의 4층짜리 건물이 이 일대 부동산 중개업자들 사이에선 “요즘 제일 잘나가는 디자이너가 있는 빌딩”으로 불린단다. 최지형의 ‘쟈니헤이츠재즈’가 2007년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는 곳이다. 가로수길에 작업실·매장을 연 많은 젊은 디자이너 중에서 그의 이름이 패션과 무관한 부동산 업계에까지 알려진 모양이다.쇼룸엔 옷이 빼곡히 걸린 옷걸이가 벽을 따라 줄지어 섰고, 한가운데엔 커다랗고 둥근 테이블이 놓여 있다. 단추 모양의 테이블엔 굵은 밧줄이 실처럼 구멍에 꿰어져 있다. 쇼룸에 어울리도록 직접 제작한 탁자다.

현실과 상상 사이 패션 디자이너 최지형

-컬렉션 주제가 밴디다스(Bandidas)였다. 2006년 개봉한 서부영화 제목인데, 뭘 보여주려고 했나.
“우리가 떠올리는 서부영화의 이미지는 정형화돼 있다. 광활하고 야생적인 풍경, 사나이들의 총질…. 이렇게 사람들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는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보여주고 싶었다. 특색이 뚜렷하고 강한 이미지를 가진 주제일수록 작업하는 게 재밌다.”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는‘쟈니헤이츠재즈’의 쇼룸과 디자이너 최지형의 작업실
-디자이너들은 옷에 멋진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설명은 추상적이고 패션쇼의 옷은 현실과 괴리가 큰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어떤 옷이든 입을 때 크고 작은 판타지를 원하는 것 같다. 티셔츠라도 내가 입으면 다른 모습이기를 원한다. 옷은 이런 소박한 판타지부터 진짜 특별해지고 싶은 판타지까지 담고 있다. 여성복은 특히 더 그렇다. 컬렉션은 그 판타지를 극대화해 보여주는 무대다. 사람들이 상상하고 꿈꾸던 옷을 보여준다. 하지만 한편으론 입을 수 있는 옷, 오래 두고 입는 옷을 만들고 싶다. 결국 꿈과 현실의 조화를 이루는 게 디자인할 때의 마음가짐이 된다.”

-꿈과 환상의 조화로운 비율이 있나.
“내 경우 상품화하는 옷은 실용적으로 만들면서 사람들이 ‘아!’ 하고 즐거워할 만큼 위트를 집어넣는다. 그 위트를 컬렉션에선 30% 정도 더 보여준다. 사람들이 더 많이 흥분하고 상상할 수 있는 옷을 보여주는 게 컬렉션이니까.”

그가 말하는 ‘아! 하는 정도의 위트’는 이런 식이다. 그의 가죽 스커트는 구멍이 뽕뽕 뚫린 ‘펀칭 레더’로 만들어져 가볍고 발랄한 느낌을 준다. 정장 바지엔 트레이닝복처럼 허리끈을 달기도 한다. 누구나 입는 아이템에, 누구나 시도해 볼 만큼만 튀는 디테일을 더한다. 그러다 보니 많이 만들어 팔지도 않는 옷이 ‘짝퉁’으로도 등장했다. 철조망 무늬가 독특한 원피스가 그것인데, 심지어는 같은 건물에 있는 옷가게에서 ‘짝퉁’을 걸어놓고 팔았다고 한다. 그는 “아무 옷이나 카피하는 건 아니니까…”라고 대중적 인기를 실감하면서, 한편으론 “힘든 공력의 시간이 존중받지 못한 씁쓸함을 느꼈다”고 말한다.
‘짝퉁’을 등장시킬 만큼 인기 디자이너가 된 최지형을 찾는 곳은 많아졌다. NHN과 아모레퍼시픽의 유니폼 작업을 진행 중이고, 3월 말엔 CJ홈쇼핑과 콜라보레이션한 새로운 라인도 선보였다.

-홈쇼핑과의 협업은 어떤가. 홈쇼핑이 고급 이미지가 아닌데, 브랜드 가치에 대한 고민은 안 했나.
“이젠 홈쇼핑에서 수입차도 판다. 홈쇼핑이야말로 큰 유통 채널의 하나이기도 하다. 과연 이렇게 큰 시장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게 뭘까 생각해 보니 매력적이었다. 옷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쟈니헤이츠재즈’와 뿌리는 같지만 좀 더 실용적인 ‘더쟈니러브(THEJOHNNYLOVE)’라는 라인을 만들어 시작했다.”

-작은 디자이너 브랜드가 대기업과 협업하는 건 어떤가.
“CJ는 채널과 네트워크를 가진 기업이다. 패션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게 홍보·마케팅이다. CJ라는 대기업이 가진 장점이 패션과 잘 어울리는 것 같으니 한번 손발을 맞추는 경험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창의적인 패션계에도 대기업의 영향력이 적잖은 것 같다. 지난해 말엔 디자이너 김재현의 ‘쟈뎅드슈에뜨’가 코오롱에 팔려 화제가 됐다.
“브랜드 초기엔 온전하게 디자이너의 창의력과 열정만으로 밀고 나갈 수 있다. 디자이너 혼자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 것까지는 한다. 점차 성장하면서 파트너가 필요해진다. 유능한 마케터일 수도, 자금일 수도 있다. 언제 적절하게 파트너를 찾느냐에 따라 브랜드의 미래가 갈린다. ‘쟈니헤이츠재즈’는 소수의 최고급 고객을 겨냥한 브랜드가 아니다. 규모가 받쳐주지 않으면 오래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 개인의 욕심으로 ‘내가 다 하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나는 계속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역할을 하고, 자금력과 유통망이 있는 파트너를 찾아 역할 분담을 한다면 브랜드가 나아가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내 또래 디자이너들이 다 같이 하는 고민이다.”

-큰 자본이 개입하고 덩치가 커지면 디자이너의 개성이 훼손되진 않을까. 하다 못해 맛집도 손님이 늘고 지점이 생기면 초창기 고객들은 변했다고 불평하지 않나.
“대기업 같은 곳과 파트너십을 맺었을 때 어쩔 수 없이 타협할 부분이 있긴 하다. 마찬가지로 지켜야 할 것도 있다. 갑자기 브랜드가 뻥튀겨지거나 색깔이 변해서는 안 된다. 판매가 덜 돼도 기다려 준다든지, 처음 사랑받았던 고유의 개성을 보여주는 프로젝트를 한다든지. 원래 고객이 배신감을 느끼거나 당혹해하지 않도록 배려가 필요하다.”

-유니폼 작업은 어떤가. 형식적인 옷이라 지루할 것 같은데.
“오히려 목적성에 맞는 디자인을 해내면서 내 틀을 깬다. NHN 유니폼의 경우 일반 직원은 입지 않는다. 안내데스크 직원, 주차요원, 보안요원, 미화원 등 사무실 밖에서 일하는 분들이 입는다. 디자이너가 한 우물을 파는 전문직인데, 옷을 통해 다양한 직군을 만날 기회를 얻은 셈이다. 또 내가 만든 유니폼을 입을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지 않나. 미화원이나 주차요원의 옷에 어떻게 상상력을 표현할 것인지, 굉장히 흥미로운 프로젝트다.”

-그럼 디자이너는 평소 현실에서 어떤 옷을 입나.
“내 브랜드를 시작하고는 쇼핑을 거의 안 했다. 여유도 없지만 생각도 달라졌다. 예전엔 옷을 보면서 (그 옷을 입은) 나를 떠올렸다. 지금은 이 옷이 우리 브랜드로 나오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한다. 과거에 머릿속에 그리는 여성이 나였다면, 이젠 내 브랜드를 입는 여성을 그린다. 그러니까 나는 점점 셔츠나 블랙 팬츠 같은 기본적인 옷만 입게 된다. 내가 색깔을 가지면 그 색깔이 나의 출발점이 돼버린다. 더 많이 상상하고 자유로우려면 내가 무채색이 되는 게 좋다.”

-최지형에게 옷은 무엇일까.
“나의 반쪽이다. 결혼 전엔 머릿속이 온통 옷이었다. 처음 내가 만든 옷을 사람들이 사서 입는 걸 보는 게 생소하고도 야릇했다. 더 발전해서 사람들이 내 옷을 입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건 마약 같은 중독성이 있다. 그래서 계속 만들고 입히고 싶었는데 결혼하고는 전부에서 반쪽이 됐다.”

-의외다. 미혼은 ‘일이랑 결혼했다’고까지 하면서 열심을 강조하는데.
“이 일을 오래 하려면 일부러라도 반반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쏟아붓기만 하고 달려 방전됐다고 느낀 순간 결혼을 했다.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친구가 생겼고, 충전하고 소모하니까 더 원활하게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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