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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으로] 이스라엘의 ‘수수께끼 듀오’

중앙일보 2012.04.14 00:00 종합 18면 지면보기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왼쪽)와 에후드 바라크 국방장관이 2009년 의회에서 귀엣말을 나누는 모습. 이란 핵문제를 둘러싼 이들 ‘강경 콤비’가 주목받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한 사람은 자신을 유대민족의 구세주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철저한 군사 임무 완수만이 관건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참 기묘한 한 쌍이죠. 하지만 바로 이 두 사람이 이란 문제의 칼자루를 쥐고 있어요.”(익명을 요구한 이스라엘 정부 관계자)

오랜 정적 네타냐후·바라크, 이란 공습에 의기투합
1972년 ‘검은 9월단’ 인질극 진압했던 전우였다



 베냐민 네타냐후(63) 이스라엘 총리와 에후드 바라크(70) 이스라엘 국방장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란의 핵개발을 둘러싸고 서방과 이란이 강경하게 대치하든, 협상 테이블에 앉든 관계국들은 이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시선을 뗄 수 없다. 경제 제재와 대화로 이란을 어르고 달래 ‘핵 야심’을 누그러뜨린다 해도 이스라엘의 공습 한 방이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원유 수송 요충지인 호르무즈 해협을 ‘인질’로 삼은 이란의 위협보다 네타냐후와 바라크가 펼치는 ‘강경 콤비 플레이’가 더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네타냐후는 최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한다”며 지하에 있는 핵시설을 파괴할 수 있는 벙커버스터를 요청했다. 바라크는 이란이 대화에 임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뒤에도 “제재만으로는 이란의 핵개발을 포기시킬 수 없다”고 딴죽을 걸었다. 미국이 일단 경제 제재가 효과를 낼 때까지 기다리며 외교적으로 문제를 풀자고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두 사람은 “이스라엘의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라며 ‘주권국으로서의 권리’까지 들고 나왔다.



 사실 정치 여정만 보면 두 사람은 어울리는 커플이 못 될 듯하다. 우선 네타냐후는 극우 리쿠드당을 이끌고 있고, 바라크는 오랫동안 중도좌파를 표방하는 노동당에 몸담아 왔다. 또 이스라엘 영토에서 태어난 첫 총리이자 최연소(당시 47세) 총리 기록을 세우며 승승장구했던 네타냐후는 1999년 총리 선거에서 부패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바라크에게 크게 패한 아픈 경험이 있다. 이어 바라크가 총리직에 오른 뒤 야세르 아라파트 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평화협상을 추진했을 때는 네타냐후가 “바라크가 너무 많이 양보하려 한다”며 연일 비판을 쏟아냈다. 이후 두 사람은 줄곧 정적 관계로 묘사돼 왔다. 로이터통신은 네타냐후를 ‘충동적인 선지자’, 바라크를 ‘침착한 책략가’로 묘사하며 이들의 조합을 ‘수수께끼’라고까지 표현했다.



특수정예부대 ‘사이렛 마트칼’ 복무 당시 베냐민 네타냐후(왼쪽·1970년대)와 에후드 바라크(1967년)
 두 사람의 성장 배경도 달랐다. 네타냐후는 군인 가정에서, 바라크는 동유럽에서 이주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 네타냐후는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를 정복하며 승리로 이끈 67년 ‘6일 전쟁’ 중에 입대해 6년 동안 복무했다. 네타냐후에게 군 복무는 ‘가업’이나 마찬가지였다. 형 조나단과 남동생 이도까지, 세 형제가 모두 최정예 특수부대인 ‘사이렛 마트칼(Sayeret Matkal)’에서 비밀작전을 수행했다. 조나단은 76년 ‘엔테베 구출작전’을 이끌던 중에 사망했다. 비행기에서 납치된 유대인 등 인질 100여 명을 구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조나단은 지금도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바라크는 동유럽에서 이주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집단농장(키부츠)에서 자랐다. 17세에 입대해 36년 동안 군에 몸담으며 최고위직까지 올랐다. 처음에는 비쩍 마르고 키 작은 소년에 불과했다. 그를 보고 특수부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놀리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바라크는 지원도 없이 사막에서 습격작전을 수행하고, 장거리 급습도 성공적으로 감행하는 등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군인’이었다. 그는 조국 이스라엘이 치른 전쟁 대부분에 참가했다. 특히 73년 가발과 하이힐을 착용하고 여장을 한 채 특공대를 이끌고 레바논 베이루트에 잠입, 뮌헨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을 살해했던 ‘검은 9월단’ 간부 3명을 제거한 무용담은 전설로 남아 있다.



 정반대 노선을 걸었고, 성장 환경도 달랐던 두 사람이 이란 공습을 놓고선 의기투합해 한목소리를 내게 된 배경은 뭘까. 우선 뉴욕 타임스(NYT)는 두 사람이 각기 다른 이유로 군사행동을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선 네타냐후의 아버지 벤지온은 유대민족운동가(시오니스트)이자 역사학자였다. 그는 유대민족이 받은 핍박과 고난의 역사를 주로 연구했다. 이스라엘의 땅을 아랍이 강탈했으니 이를 다시 확장해야 한다는 수정주의 시오니즘 관점에서 세 아들을 가르쳤다. 네타냐후가 아랍권에 무조건적인 적개심을 보이는 것도 이런 성장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네타냐후에게 이란의 핵무기 보유는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버금가는 엄청난 재앙이다. 네타냐후에게는 이런 이란의 위협을 막는 것이 가장 큰 임무다.



 바라크는 조금 다르다. 그는 ‘제2의 홀로코스트’ 등의 비유를 곧바로 일축해버린다. 대신 바라크는 ‘불패장군’답게 이란 문제에 전략적으로 접근한다. 이란이 우라늄 농축시설을 손대기 힘든 지하(zones of immunity)로 옮기고, 한계선(red line)을 넘었을 때 어떤 전략으로 이를 무력화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한다. 손쓰기 어려워지기 전에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이터통신은 “바라크는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정치가”라며 “이란의 핵 보유가 국제적 위협이 되고 있는 만큼 동포들에게 이스라엘의 군사적 우위를 증명하기 위해 이란 핵시설 공격론을 펼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네타냐후와 바라크 사이에 뿌리 깊은 유대감이 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두 사람을 가장 견고하게 묶어주는 단어는 바로 사이렛 마트칼이다. 사이렛 마트칼은 이스라엘 방위군(IDF) 소속 최정예 특수부대다. 미국의 델타 포스나 영국의 SAS에 비견된다. 사이렛 마트칼에서 같이 복무했던 40년 전, 두 사람은 처음으로 나란히 주요 외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72년 5월 8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발해 텔아비브로 향하던 사베나 항공기는 이륙 직후 팔레스타인 무장 게릴라단체 ‘검은 9월단’ 단원들에게 납치됐다. 이들은 텔아비브 인근 공항에 비행기를 착륙시켰다. 4명으로 구성된 납치범들은 승객과 승무원 100명을 인질로 잡고, 이스라엘에 수감 중인 팔레스타인 죄수 315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비행기를 인질들과 함께 폭탄으로 날려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테러범과 협상하는 척하며 구출작전을 준비했다. 일명 ‘동위원소 작전(Operation Isotope)’이었다. 납치 이튿날인 9일 사이렛 마트칼 대원 16명이 항공 기술자로 위장해 비행기에 접근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헐렁한 흰색 작업복 밑에 권총을 숨기고 있었다. 이들은 “비행기에 이상이 생겨 수리해야 한다”며 납치범들을 속여 기내 진입에 성공했다. 그리고 채 10분도 되지 않아 납치범 2명을 사살하고, 2명을 체포했다. 인질로 잡혔던 100명 가운데 부상을 입은 여성 승객 한 명이 사망하기는 했지만 이는 대항공기 테러 작전의 효시로 여겨지고 있다. 납치범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진압에 성공해 인질을 구출한 것은 동위원소 작전이 처음이었다.



 바로 이 작전을 이끈 지휘관이 당시 서른 살이었던 바라크였다. 네타냐후는 팀원으로 작전에 참여했다. 네타냐후는 당시 유일하게 부상을 입은 대원이었다. 당시 불과 스물두 살이었다. 한 동료 대원은 “아마 아군 총에 팔을 맞은 것 같은데, 네타냐후는 아무렇지 않게 이를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네타냐후는 나중에 이 작전을 돌아보며 “권총을 쥔 것은 그때가 생전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사이렛 마트칼 시절부터 쌓아온 친분은 매우 탄탄하다. 로이터통신은 이들과 함께 복무한 부대원들을 인용해 “네타냐후는 지휘관이었던 바라크에 대해 여전히 존경심을 갖고 있고, 바라크는 네타냐후가 국민의 선택을 받은 총리로서 정치적으로 본인보다 높은 직급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보도했다. 두 사람이 정치적으로 다른 노선을 걷고 있었던 97년 특수부대 모임 때의 일이다. 당시 가장 늦게 도착한 네타냐후는 자연스럽게 바라크 옆자리에 앉았다. 바라크도 네타냐후의 무릎에 팔꿈치를 대며 친근하게 기대는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의 관계를 잘 보여준 장면이다.



 특히 이들은 이란 문제에 있어 미국을 움직이기 위해 각기 ‘주특기’를 살려 상호보완적으로 움직인다. 바라크는 자신이 총리로 재임했던 1999~2001년 당시 미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 정부의 민주당 인사들과 쌓았던 인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네타냐후는 공화당과 의회 내 유대계 지지 세력을 공략하고 있다. NYT는 “두 사람은 이란 공격안을 최종 표결에 부쳤을 때 안보 내각 14명 중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각료들을 일대일로 만나 설득작업을 하고 있다”며 “아슬아슬하겠지만 8대6 정도로 이들이 필요한 찬성표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많은 이들의 예상”이라고 전했다.



‘이스라엘 듀오’가 결정적 순간 어떤 결단을 내릴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전 리쿠드당 활동가이자 네타냐후를 모질게 비판하기로 유명한 이스라엘 정치 칼럼니스트 벤 캐스핏은 지금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다행인 것은 비비(네타냐후의 애칭)가 겁쟁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위험한 것은 바로 비비 옆에 바라크가 있다는 점이다.”



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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