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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촉한 여배우 ‘생얼’처럼 … 한국 여성 빛을 바른다

중앙일보 2012.04.14 00:00 종합 30면 지면보기
모델 이솜(22)씨가 한 화장품 브랜드 광고 촬영 현장에서 ‘하루 종일 자연스럽게 빛나는 피부’를 연기하고 있다. [사진 메이블린뉴욕]


‘광채, 그 이상의 피부톤’(에스티로더), ‘촘촘하고 매끈한 마이크로 광채 피부’(SK-II), ‘하루 종일 상쾌하게 빛나는 피부’(메이블린뉴욕), ‘완벽한 빛을 연출하는 펄의 향연’(겔랑).

[트렌드] 물광→윤광→꿀광→촉광 … 광(光)메이크업 전성기



요즘 팔리는 화장품 브랜드의 광고 문구엔 ‘광(光)’ 또는 ‘빛나는’이란 표현이 흔히 등장한다. 11일 오후 백화점 화장품 매장에 쇼핑을 나온 직장인 이혜영(34·서울 반포동)씨는 “반짝반짝 빛나는 피부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귀가 번쩍 뜨인다”며 “화장품마다 피부를 빛나게 만들어준다는 데 솔깃해지는 건 당연하지 않으냐”고 말했다. 화장품 홍보대행사를 운영하는 강수진 대표는 “요즘엔 ‘광(光)’이란 글자 없이 화장품 얘기를 하기 힘들다”며 “광을 내세운 홍보 전략이 몇 년째 계속되면서 이를 표현할 새 문구를 찾느라 늘 고민”이라고 말했다. 2007년 ‘물광’에서 시작한 광 마케팅은 ‘윤광’ ‘결광’ ‘꿀광’ ‘촉광’이란 후속작을 만들어 내며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 여성들이 빛 광에 홀린 이유’를 분석해 봤다.



1 끌레드뽀보떼 라 크렘므 2 겔랑 일루미네이팅 파우더-퓨어 래디언스 3 디올 로지 글로우 블러셔 4 에스티로더 아이디얼리스트 이븐 스킨톤 일루미네이터 5 SK-II 셀루미네이션 EX 6 비욘드 피토 화이트 자연빛 에센스 7 바닐라코 잇 샤이니 쉬머 크림 8 슈에무라 인스턴트 글로우 크림 9 메이블린뉴욕 퓨어미네랄 프레시 글로우 비비크림 [사진 각 브랜드]


◆‘투명 메이크업’의 진화=11일 오후 서울 반포동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을 찾은 주부 김순영(57·서울 서초동)씨는 “성형 수술해서 예뻐졌다고 뽐내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화장 덕에 피부가 좋아졌다고 자랑할 사람도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이런 이유로 “‘광(光)’ 화장품이 계속 유행할 것”이라고 점쳤다. ‘화장 안 해도 피부미인’이란 얘길 듣고 싶은 여자들의 심리가 ‘광’ 트렌드의 원인이란 주장이다. 그렇다면 본래 ‘반짝인다’는 의미의 ‘광’이 ‘화장하지 않은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메이크업 아티스트 이경민씨는 “2000년대 중반부터 송혜교·전지현·이영애 등 톱 여배우들이 화장을 안 한 듯한 ‘투명 메이크업’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은 것이 시초”라고 설명했다. “TV 드라마나 광고, 영화에 전혀 화장하지 않고 출연할 순 없으니 이런 효과를 내기 위해 원래 피부에 약간 반짝임을 강조하면서 여성들이 ‘광’에 열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2006년 혜성처럼 등장한 비비크림이 투명 메이크업 대중화에 한몫했다”고 덧붙였다. 비비크림은 본래 피부과 시술 후 상처를 가려주는 용도로 쓰이던 연고다. 연예인들이 피부 관리를 위해 다니던 피부과 병원에서 화장 안 한 이른바 ‘생얼’(맨 얼굴)을 만들어 준다면서 입소문이 났고 급기야 2006년부터 화장품으로 대중에 알려졌다. 하지만 초기 비비크림은 잡티를 가려주는 대신 피부를 건조해 보이게 만들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해 등장한 것이 ‘물광’ 화장품이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펄’을 섞어 ‘물기를 머금은 피부’를 만들어 준대서 ‘물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비비크림이 대중화된 이듬해인 2007년 GS홈쇼핑에선 ‘물광 화장품’을 내세운 ‘루나’가 상반기 최고 히트상품으로 꼽힐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다음 해 아모레퍼시픽은 도자기처럼 깨끗하고 매끄러운 피부란 뜻으로 ‘윤광’ 화장품을 내놨다. 이후 LG생활건강 등도 가세하며 ‘결광’ ‘꿀광’ ‘촉광’ 등 각종 ‘광 화장품’이 연이어 출시됐다.



 ◆‘나도 연예인처럼 되자’는 심리=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서 딸 박이현(30)씨와 함께 프랑스 화장품 브랜드 겔랑의 메이크업 시연을 구경하던 주부 오귀례(62·서울 이촌동)씨는 “올해는 스포츠센터에서 운동을 하고 막 샤워를 끝낸 것처럼 화장하는 게 유행”이라는 행사 진행자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 이런 화장법이 어디 있겠나. 화장 했는데 방금 씻은 듯 촉촉해 보이는 건 본바탕 피부가 정말 좋은 사람뿐이다. 그래도 여자 마음은 혹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화장 했는데도 안 한 것처럼 보이게 해 준다는 ‘○광 화장품’을 사는 것이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딸 박씨도 동의했다. “최대한 화장 안 한 듯 보이는데 남보다 예뻐 보일 수 있는 비법이 ‘○광 화장품’엔 있을 것만 같다. 만약 이런 화장품을 나만 찾아낸다면 제일 친한 친구에게도 얘기하지 않는 게 여자들의 속마음”이라고 털어놨다. 결국 ‘○광’ 유행은 화장한 사실을 최대한 감추고 ‘자연 미인’인 척하려는 여성들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서울대 광고홍보학과 유승엽 교수는 “광, 즉 빛난다는 말 자체가 소비자를 안심시키기 때문에 이 유행이 계속 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어떤 물건에서 빛이 난다면 그것은 다른 사물과 비교돼 두드러진다. 남들보다 나아 보이려고 화장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남보다 돋보여 인정받는다는 느낌은 ‘빛난다’는 말 한마디에 다 압축돼 있다.” 실제로 내 얼굴이 빛날지는 알 수 없지만, 화장품 광고에서 ‘광’ 혹은 ‘빛난다’는 표현을 강조하면 소비자들은 일단 사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게 된다는 얘기다.



 화장품 홍보전문가 강수진 대표는 “흔히 연예인에겐 ‘아우라’, 즉 어떤 묘한 후광 같은 게 느껴진다며 대중이 동경하는데 ‘빛나는 얼굴’이란 게 아우라와 겹치는 점이 있다”고 말했다. 대중이 연예인을 따라 하고 싶어도 몸매나 외모를 닮기는 쉽지 않다. 늘씬한 몸매에 손바닥만 한 얼굴은 일반인의 눈에 ‘비현실적’으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화장품을 잘 쓰면 반짝반짝 빛나는 연예인의 피부를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 여자들의 심리라는 것이다.



 ◆‘광 트렌드’ 선도하는 한국 여성들=국내 화장품 시장의 ‘광 트렌드’는 해외 화장품 브랜드도 주시하는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이달 초 ‘퓨어 미네랄 프레시 글로우 비비크림’을 출시한 미국 브랜드 ‘메이블린뉴욕’은 한국 소비자의 기호를 반영해 ‘빛나는’이란 뜻의 ‘글로우(glow)’를 제품 이름에 넣었다. 이 브랜드는 같은 아시아 지역인 일본·중국에서도 비비크림을 팔고 있지만 이들 나라에선 아직 ‘광’에 관련한 이름을 달지 않았다. 메이블린뉴욕 마케팅 매니저 조도연 차장은 “한국 소비자가 유난히 ‘광 트렌드’에 민감하다”면서 “뉴욕 본사에서 한국 시장의 특수성을 감안해 제품을 개발하고 이름도 빛과 관련된 걸 지었다”고 밝혔다. 그는 “본사에선 중국·일본 소비자도 한류 스타의 화장법에 점점 눈을 뜨고 있어 한국에서 먼저 제품을 테스트해 보고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글로우’ 시리즈를 출시하고 싶어 한다”고 덧붙였다.



 겔랑의 신관홍 메이크업 아티스트 팀장은 “중국 지사의 메이크업 팀은 우리나라 아티스트들의 ‘광채 피부 표현법’에 관심이 높다”며 “어떻게 하면 한국 여자들처럼 깨끗하고 밝은 얼굴을 만들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물어 온다”고 소개했다. 신 팀장은 “전엔 유럽이나 미국의 메이크업 경향에만 신경을 쓰더니 요즘은 우리나라에서 무엇이 유행하는지가 다른 나라의 주된 관심사가 됐다”고 말했다.



 이런 경향은 최근 출시된 해외 브랜드 화장품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에스티로더는 에센스 이름에 ‘빛나는 것’이란 뜻의 ‘일루미네이터(illuminator)’를, 겔랑은 파운데이션에 ‘일루미네이팅(illuminating)’을, SK-II는 에센스에 ‘빛남’을 뜻하는 ‘루미네이션(lumination)’을 쓰고 있다. 지난해 8월 ‘광채, 그 이상의 피부톤’이라는 광고 문구를 붙여 에센스를 출시한 에스티로더의 김인애 부장은 “‘광채’라는 문구를 미국 본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면서 “글로벌 브랜드일수록 트렌드를 선도하는 한국 시장의 유행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화장품 브랜드들도 까다롭고 안목 높은 한국 여성들의 맘에 들면 일단 아시아 시장에선 승산이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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