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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자만의 빈틈

중앙일보 2012.04.14 00:00 종합 42면 지면보기
정진홍
논설위원
# 1912년 4월 10일 낮 12시15분 타이타닉호는 영국 사우샘프턴항을 출항해 다음날 아일랜드의 퀸스타운에 정박해 승객을 더 태웠다. 대부분 신대륙 미국으로 향했던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들이었다. 이로써 타이타닉호는 2206명을 태우고 뉴욕으로 첫 항해를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마지막 항해가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 월터 로드가 쓴 ‘타이타닉호의 비극 A Night to Remember, 1955’에 따르면 타이타닉호에 타고 있었던 총 2206명은 남자 1662명, 여자 439명, 어린이 105명 이었다. 이 중 선장을 포함한 선원이 898명(남자 875명, 여자 23명)이었다. 그리고 1등석에 322명(남자 173명, 여자 144명, 어린이 5명), 2등석에 277명(남자 160명, 여자 93명, 어린이 24명), 3등석에는 709명(남자 454명, 여자 179명, 어린이 76명)이 타고 있었다. 하지만 총 2206명 중 구조된 사람은 703명뿐이고 나머지 1503명이 사망했다. 성인 남자의 경우 생존자는 315명인 반면 사망자는 1348명에 달했다. 특히 3등석의 경우 55명만 생존하고 399명이 죽었다. 반면 성인 여자 중 생존자는 336명이었고 사망자는 103명으로 그중 3등석에 탔던 이가 81명이었다. 어린이는 생존자 52명, 사망자 53명이었다. 하지만 1등석(5명)과 2등석(24명)의 어린이는 모두 살았으나, 3등석의 경우엔 23명만 살고 53명이 죽었다. 결국 안타깝게도 3등석에 탔던 사람들이 훨씬 많이 죽었다. 정말이지 가슴 아픈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 5만2000t의 타이타닉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배였다. 배 길이가 약 882.5피트(약 268m)로 당시 세상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눕혀놓은 것 보다도 길었다. 굴뚝 높이만 75피트(22m)나 되었다. 풍차 크기의 스크루를 3개나 돌리는 엔진은 4층 빌딩 높이와 맞먹었다. 이 배엔 호화객실과 고급 레스토랑은 물론 수영장, 체육관, 도서관 등 없는 것이 없어 ‘떠다니는 궁전’이라고 불렸다.



 # 사고가 났던 14일 오전에는 원래 해상사고가 날 것을 대비해 구명보트 타는 연습을 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선장이 승객들의 불편을 이유로 취소시켰다고 한다. 타이타닉호에 준비된 구명보트 등에는 모두 1178명이 탈 수 있었다. 하지만 구조된 사람은 703명 뿐이었다. 정작 구명보트의 자리는 적잖게 비어있었다. 선장경력 26년의 에드워드 스미스는 타이타닉호의 첫 향해가 끝나면 은퇴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그는 본래 뉴욕 도착예정일인 17일보다 하루 일찍 도착해 승객들을 놀라게 하고 타이타닉호의 첫 항해를 축하하며 자신의 은퇴도 멋지게 장식할 요량으로 23노트의 빠른 항해를 명령했던 것이다. 게다가 빙산출몰의 경고도 6~7회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노련함만 믿고 이를 무시했다. 14일 밤 망루에 있던 두 사람이 빙산을 발견했다고 다급하게 알려왔지만 그 거대한 타이타닉호의 속도를 늦추기엔 너무 늦은 때였다. 결국 그날 밤 11시40분쯤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타이타닉호는 빙산과 비끼듯 충돌하고 말았다. 본래 타이타닉호는 배 밑의 수밀격실(水密隔室)이 4개까지 물에 차도 침몰하지 않도록 설계됐으나 빙산과 충돌하면서 5개에 바닷물이 들이쳐 버렸다. 결코 침몰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타이타닉호는 충돌 후 2시간40분 만인 15일 새벽 2시20분에 3번째와 4번째 굴뚝 사이가 반으로 갈라지면서 바닷속으로 영영 사라져갔다. 참으로 거대한 침몰이었다.



 # 자고로 위기는 항상 가장 큰 것, 가장 튼튼한 것, 가장 견고한 것이라고 믿었던 것에 덮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만의 빈틈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우리의 정치, 우리의 기업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100년 전 타이타닉호의 비극을 새삼 떠올리며 자만의 빈틈, 스스로 경계해야 하지 않겠나!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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