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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꾸민 무대, 허전한 여운

중앙선데이 2012.04.13 23:39 266호 16면 지면보기
파리의 연인 :2004년 박신양·김정은·이동건 주연으로 방영된 SBS 드라마.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재벌 2세 한기주가 불우하지만 당차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영화학도 강태영을 파리에서 만나 사랑하게 되면서 변해가는 이야기. 기주의 조카이자 동생 수혁이 삼각관계의 축을 담당한다.
“애기야, 가자!” “내 안에 너 있다.”
8년이 지났지만 대사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2004년 방영 당시 최고 시청률 57.5%를 기록하며 뭇 여성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드라마 ‘파리의 연인’이 뮤지컬로 돌아왔다. 중국·일본 등 아시아 12개국에 수출되고, 필리핀에서는 리메이크돼 국민 드라마로 떠오른 명실상부한 ‘킬러 콘텐트’를 기반으로 한 대극장 창작뮤지컬이라는 점에서 그 완성도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K팝을 넘어 K뮤지컬에 대한 호응이 절정으로 치닫는 시점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미 일본 시장 진출이 구체화된 단계로, 소극장 뮤지컬 ‘빨래’ ‘커피 프린스 1호점’에 이어 2012년 국내 창작 뮤지컬 일본 진출 전성시대를 대극장 무대로 열어가는 작품이다.

뮤지컬 ‘파리의 연인’, 5월 30일까지 서울 신도림동 디큐브아트센터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정교한 무대 미학. 브로드웨이와 일본을 오가며 동서양을 아우른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연출가 구스타보 자작이 2008년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 이어 두 번째로 우리 뮤지컬의 연출과 안무를 맡아 국제감각을 살렸다. 브로드웨이에서 활동 중인 조명 디자이너 제피 와이드먼과 할리우드 영화 ‘스파이더맨3’ 미술감독으로 유명한 김희수 무대디자이너가 보기 드물게 세련된 하드웨어를 구축해 냈다.

흔히 대극장 뮤지컬은 역사물이나 판타지를 소재로 스펙터클한 무대 세트에 공을 들여 감동을 이끌어내는 장치로 사용한다. ‘파리의 연인’처럼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현실감 넘치는 드라마의 무대화에는 스펙터클과는 차별화된 장치들이 필요한 법. 서울과 파리, 거리와 파티장이라는 일상과 판타지를 쉼 없이 오가는 무대는 화려하다기보다 빈틈없이 로맨틱하고 아름다웠다. 파리와 서울의 거리를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세트에 동화 속으로 들어온 듯 환상적인 조명, 고흐의 그림에서 모티브를 딴 영상과 배우의 동선이 절묘하게 들어맞는 순간순간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시각적 쾌감을 선사했다. 기주와 태영이 약혼식장을 뛰쳐나온 뒤, 조명으로 촘촘히 박아넣은 밤하늘 별빛 속 터질 듯 차오른 보름달이 기울며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랑이 무르익는 장면은 무대와 극이 최상의 합을 이뤘다고 평할 만하다.

왈츠·캉캉·탱고 등 유럽 댄스음악에 맞춘 다양한 분위기의 공들인 군무는 라이선스 뮤지컬을 보는 듯한 세련된 안무와 코러스로 대극장 무대를 꽉 채웠다. 1막 물랭루주에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 2막 영화관에서 ‘인디애나 존스’ ‘수퍼 맨’ ‘러브스토리’ ‘록키’ ‘007’ ‘더티댄싱’ ‘미션 임파서블’ 등 영화음악에 맞춘 패러디 군무의 행진은 유머러스한 연출로 극의 발랄하고 활기찬 분위기를 뒷받침했다. ‘셸 위 댄스 오 마드무아젤’로 시작하며 수시로 울려퍼지는 메인 테마는 로맨틱한 무드를 견고히 하며 중독성 있는 뮤지컬 넘버로서 무대 외벽을 튼튼히 지탱했다.

탄탄한 하드웨어에 비해 소프트웨어는 아쉬움이 남았다. 캐릭터와 유머감각이 잘 살았던 1막에 비해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갈등이 폭발하며 절정으로 치달아야 할 2막이 ‘반전’이라는 추진력 상실로 힘이 달렸다. 비밀을 모두가 알고 있는 상태이므로 반전을 포기하고도 갈등과 해소를 긴장감 넘치게 살려낼 장치가 필요했으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드라마에서 주축을 이뤘던 삼각관계의 미묘한 감정선을 무대에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애초에 어려운 일. 좀 더 호흡이 긴 넘버들로 관객의 잠자는 감성을 자극하는 데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객석의 공감을 유도하기보다 사건 처리와 스토리 전개에 급급하다 보니 이제 좀 터져나오려나 싶은 대목에서도 호흡이 뚝뚝 끊겼다. 때문에 작품이 절정에 다다랐다는 실감 없이 상황은 싱겁게 극복되고, 허전한 여운만 남았다.

드라마의 무대화란 결코 줄거리 확인에 그쳐서는 안 되며, 객석과 호흡하는 뮤지컬의 장르적 특성에 맞게 드라마와는 또 다른 감동을 분명히 겨냥해야 한다는 점을 환기한다면, 이 아름답기만 한 무대에 생명이 깃들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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