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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록 연재소설 - 붓다의 십자가 4. 근심 없는 나무들 ④

온라인 중앙일보 2012.04.13 18:26
부처의 장광설은 솔직히 너무 방대하고 산만하다. 그래서 아무리 불경 읽기를 즐기는 수행자라 해도 흥미가 안 일어나는 경전들이 많다. 핵심을 비켜선 너저분한 이야기들까지 죄다 모아놓고 이런 공을 들여서 새기고 인쇄하여 책으로 엮어내야 하는 것인가. 문득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러스트=이용규]




미루어 짐작컨대 사자견을 데리고 다니는 가온이 기를레일 테지만 나는 굳이 확인하고 싶었다. 복화술을 구사하는 여사제 여옥의 말이 그리 자상치 못한데다 가온 같이 수승한 영혼이 몽골 늙은이 어르글의 소생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서다.



물론 어르글의 심성이 곱고 꽤 지성적이었다는 건 인정된다. 하지만 심성이 곱고 지성적인 부계의 혈통을 타고났대서 탁월한 영성까지 지니라는 법은 없었다. 어쨌거나 어르글은 야만족의 군사 아닌가.



“가온! 가운데, 중심을 뜻하는 우리 고려식 이름이지. 가온은 하늘이며 땅이고 뭇 생명이다. 가온과 나는 이 증오의 땅에 사랑을 심으러 왔다.”



나는 증오의 땅이라는 표현에 공감하면서도 그 원인 제공자가 몽골이라는 사실 때문에 불쾌했다. 뿐더러 여사제와 가온이 무슨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몽골 카라코룸에서 경교를 복음으로 들고 파송돼 왔다는 것도 살짝 못마땅했다.



그미가 지닌 사랑의 힘을 체험했기에 그리 큰 반감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전쟁은 모든 걸 뒤섞는다. 인종도 문물도 문화도 종교도. 이 뒤섞임이 훗날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모르지만 전쟁을 겪은 이들의 고통 따위는 무시된다. 이 전쟁이 문명사적으로 가치가 있었다고 기록되면 더 그렇다. 잔인한 노릇이다.



“고통은 우리네 인생의 본질입니다. 밖에서 구원자가 와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스스로 고통의 고리를 끊고 넘어가야 하는 거지요.”



나는 불교의 핵심적인 인생관인 사성제(四聖諦)를 언급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번뇌를 부르고 고통의 원인이 된다. 탐욕은 무신정권의 권력욕과 불교계의 물욕이 대표적이고, 성냄은 몽골군이 일으킨 전쟁이 극치다. 어리석음이야 우주에 한 점 인생이 지닌 한계 같은 것이었다.



“스스로 끊을 수 없는 고통이 이 세상에는 많다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그대는 말하는구나. 마을에 내려가 사람들을 만나보라. 바깥세상에서 하나같이 탐욕과 증오의 화살을 맞은 이들이다. 그들은 우리 마을에 들어와 복음을 전해 듣고 상처를 치유했으며 화평을 얻었느니라. 하늘에 온전히 맡기면 편안해지느니라.”



여사제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만 내려가 보라는 뜻이었다. 밖으로 나오기 전에 나는 통나무집에 배어있는 깊은 향기를 인식한다. 송진 냄새와 오래 된 책장을 넘길 때 나는 냄새, 야생당귀를 섞어놓은 것 같은 향기다.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눈이 먼 날 날 오후, 내 방에 들어왔다 나간 이가 이 향기를 뿌렸었다.



“며칠 전, 내 방에 향을 피우고 가셨죠?”



“그대가 바디고개에서 괴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놀란 심신을 안정시켜주고 싶었지. 그래야 그대 자신을 볼 수 있으니까. 나는 혀가 잘리고 나서야 비로소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 말하는 법을 배웠다. 누구라도 자기 자신과는 혀 없이도 대화할 수 있는 거니까.



타인에게 말 걸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먼저 말하고 동의를 얻을 필요가 있지. 나를 울리는 진실, 그 진정성이 밖으로 울려나올 때,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러면 세상 그 누구와도 통한다. 세계관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를지라도. 그게 대화다.”



여사제가 내 방에 들어와 말없이 향을 피우고 나간 까닭을 말해줬다. 당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눈이 멀어버린 내가 바깥세상이 아닌 내 자신을 보기를 바랐다는 뜻이었다. 혀가 없어야 대화할 수 있고 눈이 없어야 실상을 볼 수 있다는 역설로 들렸다.



나는 통나무집을 나왔다. 울창한 숲속에 폭포소리가 울렸다. 어느덧 오후 새참 무렵이 돼버렸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술이 덜 깨 있었다. 하지만 비틀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니다. 아까 새벽녘에 이 통나무집 나무문을 처음 열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존재다. 청정비구가 파계승이 돼버렸으니까. 그것도 하필이면 이교도 여인에게 동정을 바쳤다.



동물들은 암수가 교접하여 종족을 번식한다. 그중 인간은 종족 번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도 교접한다. 성적 쾌락을 즐기는 것이다. 아름답게 치장하고 특별한 능력을 보여서 상대를 유혹한다. 문화와 문명은 거기서부터 출발했을 게다. 하거늘 종교에서는 성을 억압하고 죄악시한다. 달콤한 성의 세계에 처음부터 발 들여놓지 못하게끔 철저히 단속한다.



왜 그러는지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성은 인간 의식에 잠재된 본질적 요소다. 성욕은 죄가 아닌 것이다. 다만 그것이 주는 극도의 쾌감 때문에 한번 빠져들면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집착하게 된다. 득도하여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수행자가 성적 유희에 빠져버리면 끝장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차단해버려야 병통이 안 생긴다. 성적 유희를 경험하고도 자유자재로 들고 나올 수 있다면 굳이 막을 이유가 없다. 무지한 상태로 인간구원을 말하는 것보다 본질을 파악하고 나서 뛰어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으니까.



이교도를 통해 성에 눈을 뜨고 향유한 나는 누구인가. 내 실체는 본래 없었다. 내가 보고 경험하는 대상 역시 실체가 없다. 모든 게 공(空)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집착한다고 진리에 가닿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번뇌만 일어날 뿐이다. 번뇌는 고통의 원인이 된다.



나는 오솔길을 내려왔다. 유도화 군락지 근처에 매놓은 인보의 말이 땡볕에 노출돼 있었다. 새벽녘에 여기 말을 매어놓을 적에는 바로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자그마치 여섯 시진을 넘겨버렸다. 땡볕 속에서 풀은 뜯었지만 물은 마시지 못했다.



나는 유도화 향기를 맡아볼 겨를도 없이 말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과했다. 시냇가로 데려가 물을 먹였다. 인보가 산막에 올라가 여사제와 밤을 보냈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 내 생각에 인보는 여사제와 정을 통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랬다면 유도화 향기에 취하여 맹독에 중독되지 않았을 게다. 내 경험에 의하면 성적 쾌락은 유도화 향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나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닥종이 만드는 제지소(製紙所)에서 일하는 여인이라고 했다. 한쪽 다리를 땅에 끌고 다니는 그 여인은 마루 위에 보따리 하나를 올려놓았다.



“옷을 한 벌 지었어요.”



갈아입을 옷이 없던 나는 무척 반가웠다.



“그런데 왜 제게?”



재가신도들이 승려를 시봉하는 건 공덕을 쌓는 일이었다. 스스로 해탈할 수 없는 재가신도들은 해탈의 길을 걷고 있는 승려들을 후원함으로써 다음 생애에 좋은 데서 태어난다고 믿는다. 하지만 경교를 믿는 이 마을의 경우는 달랐다. 이교도들이 나를 시봉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 마을 스님들께서 입는 흰 가사는 쇤네가 죄다 도맡아 지어올린 답니다. 스님 건 먹물 옷이라 잿물을 들였구먼요.”



몽골군 말발굽에 짓밟혀서 발 하나를 잃었다는 여인은 승려들 옷을 지어 입히는 걸로 공덕을 쌓고 있었다. 불편한 몸으로 제지소 일도 쉽지 않을 텐데 옷까지 짓는다니 참 바지런했다. 나는 여인의 공덕이 온전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기꺼이 승복을 받았다.



아무런 조건 없이 베푸는 보시는 아름답다. 다음 생애에 복 받고자 하는 보시라도 상관없다. 업을 상품화하는 것일지라도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니까. 나라면 확실치도 않는 업보에 대비해 재물과 노동력을 바치지 않겠다. 차라리 나 자신에게 충실해서 현실적인 풍요를 누리겠다.



여인은 돌아갔고 나는 끈적거리는 몸을 닦은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개운해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가온이 사자견을 데리고 나타난 건 그때였다. 기를레, 빛나는 사람이라는 몽골 이름답게 가온은 볼 때마다 광휘로웠다. 붉은 털을 지닌 사자견 또한 빛나는 풍채를 자랑했다.



“스님, 판각 공방에 가요 우리.”



가온은 다짜고짜 내 손을 잡아 이끌고 판각 공방으로 간다. 또각또각, 조각칼 내려치는 망치소리가 울려나온다. 가온을 따라 한 공방에 들어서자 경판을 새기던 각수장이들이 앉은 채로 눈인사를 했다. 가온은 작업대 앞에 앉아서 내게 빈 의자를 권했다. 새기다만 판화 한 장이 놓여있었다.



“가온이가 새기던 건가?”



“예. 이규보 상국의 대서사시 『동명왕편』 가운데 주몽의 탄생 이야기를 새겨보려고요.”



나는 판자에 거꾸로 붙여있는 밑그림은 살펴보았다. 햇살을 받은 여인 하나가 커다란 알을 낳았고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오는 그림이었다.

부여 금와 왕이 하백의 딸 유화를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만났다. 유화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해모수와 사통하여 귀양 온 처지였다. 금화가 유화를 데려와 집에 두었더니 햇빛이 비쳐 몸을 피해도 좇아가며 비추었다.



이로 해서 잉태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 들이나 되었다. 어미가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기골이 영특하고 기이하여 일곱 살 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그러고 보니 성령으로 잉태한 예수와 하느님의 아들 해모수를 거쳐 햇빛으로 잉태한 고주몽 탄생 설화가 서로 흡사한 데가 있구나. 유화부인에게 해모수가 있었다면 마리아한테는 요셉이 있었지.”



나는 두 설화를 비교하여 유사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몽골 칭기즈칸의 탄생도 비슷하답니다. 밤마다 밝은 금빛을 띤 사람이 겔 꼭대기 창문 에루게를 통해 들어와 후엘룬의 배를 비치자 그 빛이 뱃속으로 들어가 하늘의 아들이 되었지요.”



가온은 영웅탄생 신화를 그대로 믿고 있는 눈치였다.



“우리보다 불과 50년 전쯤 태어난 이가 세계를 통일한 영웅이 됐다고 해서 그 탄생을 신화로 가공하는 게 옳다고 보느냐?”



나는, 아직 어리지만 남녀가 교접하여 아이를 낳는 이치를 알고 있을 가온에게 그렇게 물었다. 가온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스님,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신 일, 곧 육신이 영혼으로 인하여 생겼다는 건 믿기지 않는 기적이지요. 더 믿기지 않는 기적이 뭔 줄 아세요?”



가온이 맑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내가 머뭇거리지 가온이 다시 물었다.



“스님은 우리 몸에 깃든 영혼을 인정하세요?”



“물론이지. 윤회는 영혼으로 하는 거니까.”



“그럼 몸이 없으면 영혼이 붙을 데가 없겠군요.”



“그렇겠지. 중음계를 떠돌 테지.”



“성령으로 잉태한 예수님의 기적보다 우리 몸으로 인하여 존재하는 영혼이 더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위대한 불멸의 영혼이 늙고 병들기 쉬운 몸뚱이에 깃들다니요. 기적중의 기적이 아닌가요?”



가온은 조각칼로 부챗살 문양을 새기기 시작했다. 밝게 퍼지는 햇살이었다. 나는 햇살보다 더 밝은 이 아이의 탁견에 감탄하며 곰곰이 되새김질을 해보았다. 가온의 말에 십분 공명한다.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보다, 누추한 우리 몸에 깃든 불멸의 영혼이 더 큰 기적 아닌가. 어떤 말이건 가온이 의미를 두고 말하면 이처럼 울림이 깊어진다. 나는 탄복한다.



“야, 이 녀석아! 재벌새김을 이렇게 하면 어떡해! 귀한 경판 한 장 다 망쳐놓았잖아!”



옆방에서 고함소리가 났다. 노발대발 꾸지람은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나는 옆방으로 건너갔다. 대머리 사내가 떠꺼머리 청년을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대머리 각수장이 사내가 목례를 한 다음, 망친 경판 부위를 가리켰다. 『종문척영집(宗門?英集)』하권이었다. 별반 중요하지도 않은 경전이었지만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좋아보였다.



“재벌새김을 이렇게 망쳐놓으면 마무리새김을 아무리 잘해도 안돼요. 경판 한 장 버린 거지요.”



각수장이 사내는 중급 정도의 연습생이 욕심을 부려서 마무리까지 하려다가 망쳐놓은 곳들을 지적했다. 손재주가 늘면서 획수가 복잡한 글자까지 손을 깊이 대서 칼날이 글자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지금은 괜찮은 것 같지만 자기가 마무리새김을 하게 되면 획이 떨어져버릴 여지가 많다고 했다.



한 두 글자면 파내고 다른 나무에 파서 끼워 넣을 수도 있지만 너무 많기 때문에 버려야 한단다. 신성한 경판을 누더기로 만들어 납품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김승 공방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승정 어른, 그거 아세요? 경판 한 장 완성하는데 얼마나 많은 이들의 땀과 정성이 들어가는지요. 우선 벌목공이 곧게 자란 아름드리 벚나무, 거제수나무, 서어나무, 돌배나무, 단풍나무 등을 고르게 되죠. 크다고만 재목이 되는 게 아니랍니다.



나무의 결이 곧아야 해요. 굽거나 뒤틀리면 칼날이 제대로 먹지 않거든요. 속에 옹이가 박힌 건 초장에 버려버려야 해요. 사람도 겉은 멀쩡한데 성격이 뒤틀려있거나 못이 박힌 것들이 있잖아요. 꽁한 것들도 많고요. 그런 인간은 몹쓸 인간이잖습니까? 재목이 될 나무가 선정되면 나무에 더 이상 물이 오르지 않는 처서가 지나서 벌채를 합니다.



가을에서 이른 봄 사이에 탕개톱을 가지고 하지요. 보통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서 톱질을 합니다. 나무 잘 못 베다가 사람 다치기 십상이지요. 큰 나무가 넘어질 때 사람 하나 결딴내는 건 아무 것도 아니거든요. 나무가 넘어지면 3자 크기로 잘라서 한 두 해 응달에 방치해둡니다.



진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거지요. 그걸 목도로 운반해 오는 일은 또 여간 큰일이던가요? 어깻죽지기 끊어질 지경이지요. 가파른 산속에서 평지로 운반해 와 탕개톱이나 붕어톱으로 판자를 켭니다. 한 치 반쯤의 두께로 켜야 대패질하고 나면 한 치 판자가 됩니다. 이때 나무 심이 있는 가운데 부분은 버려요. 나무 심 부위는 마르면서 갈라지기 십상이거든요.



아시겠어요? 판자로 켰으면 그걸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소금물에 삶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마르면서 생기는 갈라짐과 틀어짐, 굽음을 방지하게 되거든요. 삶은 판자를 말리는 것도 보통 정성이 들어가는 게 아니랍니다. 엎치락뒤치락 하며 새끼줄로 묶고 정(井)자로 쌓고 돌로 눌러놓고 하여간 일 년을 지극정성으로 말린단 말씀입니다.



이렇게 3년을 공들여서 반듯한 판자를 얻는 거랍니다. 아시겠어요? 숫제 아이 낳고 기르는 것도 다를 바가 없다니까요. 건조가 끝난 판자는 다듬기에 들어갑니다. 사람새끼로 치면 교육시키는 거나 다름없지요. 먹줄을 튕겨서 한 장 한 장의 치수를 정합니다. 다음에는 마구리에 들어갈 네 귀퉁이를 톱으로 잘라냅니다.



그 다음에는 자귀질을 거쳐 대패로 매끄럽게 깎아냅니다. 이제 비로소 글씨를 새길 준비가 끝난 겁니다. 표준에 맞춰 정성스럽게 쓴 판하본이 준비됩니다. 당대 명필인 필경사들의 몫이지요. 2층 우리 탁연 어른처럼요. 그 판하본을 글씨 면이 판자 쪽에 가도록 뒤집어 붙입니다.



그 위에 한 번 더 풀질하여 말렸다가 참깨를 볶지 않고 짜낸 호마유나 유동나무 기름을 바릅니다. 기름은 나무에 스며들어 새김질을 부드럽게 해줄뿐더러 글자를 선명하게 해주죠. 그건 승정 어른께서도 자주 보셨을 겁니다. 자, 이제 숙련된 솜씨를 지닌 우리 같은 각수장이들의 진검승부가 시작됩니다.



물론 조수들이 여럿 있지요. 허드렛일을 하는 초짜빼기, 행과 행 사이 빈 공간을 파내는 초보새김이, 글자의 획이나 삐침 부분을 제외한 글자와 글자 사이를 따내는 재벌새김이, 마지막으로 저 같은 장인이 마무리를 하고 시주자나 공방 대표 이름, 혹은 새긴 이 이름을 변계선 밖에 음각합니다.



그런데 이 시건방지다 못해 엉덩이에 뿔난 놈이 고작 3, 4년 정도 조각칼 잡더니만 자꾸 복잡한 획수의 글자에 손을 대는 겁니다. 잘만 새기면 누가 뭐라겠어요. 보세요. 칼날이 거미줄처럼 글자들을 범하고 있잖아요.



이 경판은 땔감으로 밖에 못써요. 어떤 각수장이는 한 글자 새기고 합장하며 삼배를 올린다는데 이놈은 코나 후벼 파쌓고 여자 후리는 노래나 줄곧 흥얼거린답니다. 손재주 좀 있다고 칭찬했더니 아주 기고만장해요.”



귀에 딱지가 내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듣고 보니 한 장의 경판에 들어가는 땀과 정성이 여간 아니었다. 글자 한 자 새길 때, 어느 각수장이가 합장하며 삼배를 올리겠는가. 삼배를 올지지 않아도 거기에 담긴 세월과 정성이 백팔배보다 컸다.



나는 새삼 팔만대장경이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새길만한 내용들인가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의 장광설은 솔직히 너무 방대하고 산만하다. 그래서 아무리 불경 읽기를 즐기는 수행자라 해도 흥미가 안 일어나는 경전들이 많다. 핵심을 비켜선 너저분한 이야기들까지 죄다 모아놓고 이런 공을 들여서 새기고 인쇄하여 책으로 엮어내야 하는 것인가.



문득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수행자의 미덕이 아니겠는가. 세상의 병이 오만가지라고 오만가지 약을 만들어야 한다면 약 공해다. 그건 약이 아니라 약 세상이다. 그래서 범주(範疇)라는 게 필요하다. 종교란 한 가지 약으로 만병을 통치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지밀 승정, 여기 계시는군요.”



뒤 돌아보니 김승이 웃으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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