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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들 어떠리 … 안방극장은 찌질남이 대세

중앙일보 2012.04.13 00:00 종합 26면 지면보기
류진행(류진) 아나운서는 카메라 앞에만 서면 실수를 연발한다. 늘 멋진 역만 맡아온 배우 류진이 시트콤 ‘스탠바이’에서 빈틈 많고 어수룩한 캐릭터에 처음으로 도전했다. [사진 MBC]
류진행(류진)은 아나운서계의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이다. 단, 입을 열기 전까지만 그렇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큐 사인이 떨어지면 ‘차도남’은 온 데 간 데 없다. 헐레벌떡 녹화장으로 가다 대본을 떨어뜨려 생방송을 엉망으로 만들고, 인터뷰 상대의 얼굴을 마이크로 쳐 코피를 내는 아나운서계의 ‘찌질남’만 보일 뿐이다. MBC 새 시트콤 ‘스탠바이’ 얘기다.


차도남 대신 시트콤·드라마 주역으로

 시청률 30%를 넘기며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KBS)’은 또 어떤가. 여기서 돋보이는 이는 훈남 의사 방귀남(유준상)이 아니다. 왕년의 반짝 스타 윤빈(김원준)이다.



 한때 잘 나가는 가수였던 ‘원조 빈이 오빠’ 윤빈은 “햇살로 눈을 뜨고, 사방에서 바람이 불고, 작은 정원이 있는 집”을 월세 30만원에 찾다가 옥탑방에 살게 된다. 영수증에 사인해달라는 슈퍼 주인의 말에 자신의 사진을 꺼내 사인을 해주고, 옥상 마당에 내놓은 피아노와 함께 셀카를 찍 는 그의 모습에 폭소가 터진다.



 어수룩한 ‘찌질남’들이 시청자를 무장해제하고 있다. 완벽하고 도도한 매력으로 여심을 사로잡던 ‘차도남’의 영역을 밀어내고 있다. 예컨대 드라마 ‘패션왕(SBS)’의 유아인, ‘더킹 투하츠(MBC)’의 이승기도 덜 떨어진 모습으로 초반에 승부를 걸었다.



 ◆예능 프로 인기의 후광=‘스탠바이’에서 류진행 역을 맡은 배우는 류진(40)이다. 늘 반듯하거나 멋진 역을 맡아온 그가 데뷔 17년 만에 시트콤에 도전했다. 우스꽝스런 춤도 마다하지 않는 ‘선녀가 필요해(KBS)’의 차인표, 처음으로 망가지는 역할에 도전하는 ‘해피엔딩(JTBC·23일 시작)’의 박정철도 유사한 대열에 합류했다. 악역을 맡더라도 ‘폼’은 포기하지 않았던 스타들이 잇따라 찌질남에 도전하고 있는 것은 예능 프로그램의 인기 덕이 크다.



 TV평론가 김선영씨는 “예능프로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배우들의 출연 기회도 늘어났다. 배우들이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예능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종전과 다른 모습으로 호평을 받고, 다양한 역할도 맡게 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덕분에 ‘망가짐’에 대한 배우들의 두려움도 줄어들었다.



김원준
 ◆친근감으로 공략=드라마·시트콤 속 찌질남들은 허세도 부리고, 얄미운 짓도 하지만 밉지는 않다. 완벽하지 않은 모습에 오히려 시청자들은 친근감을 느낀다. ‘스탠바이’의 박순태 CP는 “찌질남들은 답답할 때는 있지만 대체로 선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런 인간적인 매력은 전 세대를 공략할 수 있는 코드다”고 말했다. 숨막히는 경쟁사회에서 일종의 쉼터 역할을 한다는 설명이다.



 김선영씨는 “최근 가장 인기였던 ‘해를 품은 달’의 이훤(김수현)조차 근엄하고 멋있는 모습만 보여주지 않았다. 가부장제 안에서의 고정적 이미지, 즉 완벽하고 근엄한 모습만 있으면 사람들은 더는 매력적으로 느끼지 않는다”고 풀이했다.



 ◆중견 남자배우들의 약진=류진(40)·김원준(39)·차인표(45)·박정철(36) 등 찌질남 캐릭터에 도전하는 이들은 대부분 30대 이상 배우들이다. ‘꽃미남 열풍’이 불며 20대 남자 배우들이 성장하자, 그들과 비교할 수 없는 부분에서 경쟁력을 찾겠다는 전략이 작용한 측면도 있다.



 ‘반전의 묘미’를 노리는 연출자 입장에서도 이들은 반가운 손님이다. 박순태 CP는 “언제나 멋지고, 완벽한 모습만 보여줬던 류진씨를 섭외한 것은 반전을 노렸기 때문이다. 전혀 웃길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빈틈을 보여주면 웃음이 더 커진다. 연기 인생 중반부에서 변신을 꾀하는 배우들도 못난 캐릭터를 꺼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드라마·시트콤 속의 ‘찌질남’



▶ ‘스탠바이(MBC)’의 류진행(류진)=이름은 ‘진행’이지만 실수만 연발하는 방송국 아나운서. 생방송 뉴스 시간에 지각하는가 하면, 인터뷰해야 할 사람의 얼굴을 마이크로 치는 등 커다란 실수도 저지른다. 결벽증까지 있어서 이래저래 피곤한 인생을 산다.



▶ ‘넝쿨째 굴러온 당신(KBS)’의 윤빈(김원준)=왕년의 반짝 스타. 인기가 저문 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자신이 스타인 줄 알고 허세만 가득하다. “월세 30만원으로 정원 딸린 집 구한다”고 할 정도로 대책 없는 스타일.



▶ ‘패션왕(SBS)’의 강영걸(유아인)=동대문에서 짝퉁을 만드는 옷가게 사장이었지만, 사채업자에게 쫓기게 되며 원양어선에 몸을 싣고 뉴욕으로 간다. 잘 알지도 못하는 고교 동창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생떼를 쓰는가 하면, 남의 면도기를 빌려 쓰기도 한다.



▶ ‘청담동 살아요(JTBC)’의 못난이 삼형제(김우현·최무성·박상훈)=혜자네 집에서 하숙 하는 세 남자. 외국으로 유학 보낸 자식의 학비를 대느라 삼각김밥과 소주로 저녁을 때우는 모습 등에서는 애잔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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