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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이야기가 있는 집 ⑫ 우찬규 학고재 대표의 팔판동 삼호당(三乎堂)

중앙일보 2012.04.12 04:28 주말섹션 4면 지면보기
1 4월은 학고재 우찬규 대표의 집 ‘삼호당’의 향이 가장 깊은 달이다. 꽃잎은 희고 꽃받침도, 수술도 푸른 청매가 피었다. 2 삼호당은 주련의 집이다. 기둥마다 추사의 대련이 붙어 있다. 우 대표는 툇마루에 앉아 안뜰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대문 열자 청아한 꽃망울 … 매화에 빠진 집주인의 기품 엿보다

나이 들면서 더 자주 느끼는 게 삶의 신비함이다. 일상과 합리 너머에서 따로 작동하는 계산법이 있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많다. 학고재 우찬규 대표의 서울 팔판동 집 ‘삼호당’에 가서도 그런 신비를 느꼈다. 탐매(探梅)와 문향(聞香)과 매화음(梅花吟)이 수백 년 시간을 섞바꾸며 넘나드는 광경이 거기 있었다. 대문을 열자 청아한 꽃망울을 단 ‘수양매’가 천천히 바람에 흔들렸고, 담장 아래 소슬하게 서 있는 매화나무들은 가지도 빛깔도 꽃도 향도 그야말로 ‘기품의 최고치’에 이르고 있었다. 그건 청매라 했다. 꽃잎이 희되 녹색 쪽으로 당겨진 흰빛인 건 꽃받침과 수술이 연한 녹빛을 띠기 때문이다.



 실은 나는 겨우내 팔판동 ‘삼호당’에 매화가 피기를 기다렸다. 올봄은 절기가 몹시도 더뎠다. 자연 운행의 질서가 기어이 어그러지는가 싶은 불안도 없지 않았다. 4월이 돼서야 마침내 꽃이 벙글었단 ‘개화 늬우스’가 당도했고, 나는 한달음에 팔판동으로 달려갔다.



 알다시피 팔판동은 8명의 판서가 난 마을이란 의미다. 지금 조선시대 지적부가 없으니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 팔판서의 본가가 현재의 삼호당 위치인 걸로 추정되는 방증자료는 꽤 있다. 우선 이 동네에 이만한 규모를 갖춘 집이 없다는 점, 조선 초 팔판서를 배출했던 강릉 김씨가 소유하고 있었던 점, 풍수상 집이 놓인 위치가 예사롭지 않다는 점 등이 그런 추론의 굵직한 이유들이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이 집 뜰에 가득한 매화를 그 증명으로 들고 싶다. 매화는 우 대표가 익애(溺愛)하는 꽃이다. 우 대표는 갤러리 학고재와 출판사 학고재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학고재라는 이름 자체가 ‘학고창신(學古創新)’의 줄임이니 매화를 좇는 그의 행적은 연원이 깊다. 탐매도를 찾아다니고 매화음을 모아 책을 만드는 사이 그는 절로 ‘매화’에 빠져들었다. 예전 중앙일보 ‘삶과 문화’란 칼럼에 ‘퇴계 이황의 매화 사랑’이란 글을 쓴 적도 있는데 그토록 여운이 오래가는 글은 정말 드물다고 나는 여전히 탄복하는 중이다(독자 여러분도 한번 찾아서 읽어보시기를!).



 삼호당엔 지금 매화가 아홉 그루 있다. 수령이 30년쯤 된 매화들로 그중 여덟 그루가 도산매의 후예들이다. 도산매란 가지도 줄기도 꽃받침도 수술도 모두 푸른 청매로 퇴계선생이 즐기셨던 매화의 이름이다 “청매가 가장 고결합니다. 향도 더 깊지요. 청매인 줄 알고 뒤뜰 석등 좌우로 두 그루를 심었더니 오른쪽 것은 백매더라고요. 백매는 꽃잎은 희어도 꽃받침이 붉어 맑은 기운이 조금 덜하지요.”



 지금 언급한 뒤뜰 석등도 예사 물건이 아니다. 이 집을 사서 복원작업을 하는 중에 안뜰에 파묻혀 있던 걸 캐내었다 한다. 고려 때 석등으로 추정된다니 21세기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오는 것은 삼호당의 특징이기도 하다.



 “조선 최고의 천재는 매월당입니다. 매월당이 강릉 김씨거든요. 세종이 다섯 살 난 김시습을 불러 시를 짓게 했다면 집이 궁궐 근처에 있었을 거란 말이지요. 저는 그래서 조심스럽게 이 집이 매월당의 생가가 아닌가 추론해 봅니다.”



 마침 내가 찾아간 날은 삼월 보름이었다. 매화에 비낀 달이라…. 600년 전 바로 여기서 어린 매월당이 살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대도 막 ‘매월당’이란 이름을 연상할 참이었다. 게다가 이 집 당호는 삼호당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껍지 아니한가.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불평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호(乎)’를 셋 취했지요.”



3 논어 첫 구절에서 따온 당호. 고당 김충호 선생의 글씨다. 4 안뜰은 괴석과 늙은 모란 한 그루만 두고 텅 비웠다. 5 안채에서 내다본 뒤뜰 모습. 집을 복원하던 중 발굴해 낸 석등 좌우에도 매화를 심었다. 6 안채 식당. 벽마다 문을 내 그림 걸 공간이 없을 정도다. 이 집엔 문짝이 모두 330짝이나 들어갔다고 한다. 7 현대식 주방가구를 놓은 부엌.[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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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호당’으로 집 이름을 삼으면서 그는 학습과 사귐과 군자됨, 이 셋을 삶의 궁극 목표로 삼고자 했다. 그러고 보니 매월당 김시습의 ‘시습(時習)’ 또한 바로 이 구절에서 나온 게 아니던가. 매화와 논어와 땅과 사람과 역사와 철학이 얽히고 겹쳤다. 그 위로 매향이 아련히 흘렀다. 이걸 그저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제가 한때 풍수를 제법 공부했습니다. 사랑채에서 바라보면 감사원 너머로 ‘일자문성’이 보여요. 천재가 나올 지세지요. 뒤로 둥근 봉우리 보이지요? 저게 백악인데 풍수상으로 ‘귀인봉’입니다. 팔판서가 나올 만하지요.”



 우 대표는 이런 말을 특유의 수줍음을 잃지 않은 채 말했다. 그를 처음 본 지 10년이 넘었다. 그간 학고재는 괄목성장했고 문화계에서 우 대표의 위치 또한 더욱 돌올해졌고 그새 손자 둘을 둔 조부까지 됐건만 여전히 그의 이미지는 겸허하고 소탈한 학인이다.



 “고람 전기의 매화서옥도를 보면서 언젠가 저런 집에 살고 싶다고 오랫동안 꿈꿔왔습니다. 삼호당 풍경이 인제 매화서옥을 닮아가는 듯해요.”



 하지만 삼호당은 그림 속 매화서옥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대지 500㎡(약 150평)에 건평 205㎡(62평)의 입구(口)자 기와집이다. 한 6년 공들인 끝에 이전 주인이었던 80대 노인에게서 기어이 사들일 수 있었다. “제약회사 사무실로 쓰고 있더라고요. 온통 시멘트로 싸발라서 한옥의 형태가 다 망가져 있었어요. 터를 좀 볼 줄 알았기에 오랫동안 눈독을 들였지요.”



 집을 손보려고 기와를 걷었더니 목재가 다 썩어 있었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어 옛 모습을 복원해 다시 지었다. 내부 설계는 승효상 선생이 하고 대목은 김진주 선생이 맡았다. 짓는 과정은 철저히 전통 방법을 고수했다. 쇠못 하나 치지 않았고 벽은 다시마 아교에 흙을 개어 여덟 번씩 덧발랐다. 대들보와 기둥은 귀한 조선솔 대신 남미산을 썼다.



 이제 이사온 지 8년째, 살수록 만족도가 높아진다. 해마다 뜰에서 따는 매실이 30∼40㎏은 족히 된다. “사군자를 좋아했으니 처음에는 뜰에 매화와 국화만 심었어요. 가장 먼저 피는 꽃과 가장 나중에 피는 꽃으로! 그러나 나이 들면서 보니 너무 개결한 것만 좇는 것도 아니구나 싶더군요. 매화와 국화가 피는 간격도 너무 길고…. 그래서 나중엔 여름꽃인 모란도 심기로 했습니다. 유월엔 뜰에 모란이 100송이 넘게 핍니다. 매화철과 모란철엔 골목에 들어오면 벌써 향내가 진동을 하지요”



 이 덩실한 기와집에 지금은 부부와 딸 세 식구만 살고 아래채에 살던 아들 내외는 얼마 전 딴살림을 났다. “손주 둘이 주말이면 한문을 배우러 할아버지한테 옵니다. 한 주일에 하루씩은 녀석들을 데리고 자지요.” 전통 유가에 내려오던 격세교육이 삼호당에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귀인봉과 일자문성이 보이는 집에서 회임하고 출산한 손자가 어떤 인물로 자랄지 자못 기대가 크다.



 삼호당은 주련의 집이다. 흡사 예산의 추사고택 같다. 걸린 글귀도 온통 추사의 것이다. 올봄엔 집 안에 이런 대구 하나쯤 걸어도 좋으련만! 여기서는 서재 앞의 한 구절만 소개하기로 한다.



 “好古有時搜斷碣(호고유시수단갈·옛것이 좋아 때로 깨어진 비석을 찾아다니고), 硏經婁日罷吟詩(연경루일파음시·경전 연구에 빠져 며칠간 시도 읊지 못했구나).”



글=김서령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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