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연종의 미술 투자] 미술로 서연종의 미술 투자 마술 보여주는 화가, 박민준의 놀라운 화폭

중앙일보 2012.04.12 04:25 주말섹션 6면 지면보기
서연종
하나은행 삼성역지점장
전시장에서 박민준의 그림을 보노라면 관람객들이 “와 예술이네”라며 감탄하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그가 그린 고대의 낡은 건축물과 조각 등은 마치 화면에 실물을 떠다 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자연스레 마모되고 이끼로 물든 낡은 건물의 표면 묘사는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날카롭고 섬세하다. 2005년 당시 40호 크기의 작품이 400만원 정도였던 박민준의 작품은 2007년 5월 27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추정가의 8배가 넘는 5500만원 정도에 낙찰됐다. 이른바 인기 작가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때마침 2007∼2008년 미술시장의 호황기로 접어들면서 박민준의 그림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아사 천에 아교를 몇 겹으로 바르고 전통적인 그라운드 기법을 고집하며, 한 명의 조수도 없이 그리는 그의 그림은 1년에 20점이 채 넘지 않는다.



 그림이 없어 못 팔 정도로 찬란했던 2007년 그는 홀연히 도쿄예술대학원으로 재료 기법을 공부한다며 떠났다. 더 완벽해지기 위해서였다. 그는 일본에서 공부를 마치고 단신으로 뉴욕으로 건너갔다. 뉴욕에서의 그의 생활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낭만거지’의 모습, 그 자체였을 터다. 치열한 뉴욕의 미술세계에서 직접 보고 느낀 박민준은 원숙한 회화의 경지에 이른다. 2009년 뉴욕 가나 아트 갤러리 전시에서 더 원숙한 경지의 작품을 선보였고, 작품은 모두 팔렸다.



박민준의 ‘Fandango(2012)’ 리넨에 오일, 각각 58.4×43.1cm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지오를 좋아한다는 박민준의 회화는 고전 회화의 세계로 우리를 돌려놓는다. 그는 미술로 마술을 보여준다. 인물 배치와 도상 차용 등으로 고전 회화의 세계로 돌아간 듯 보이지만 화면 곳곳에 숨은 장치들이 있다. 고전적인 화면 안에 현대인의 복장·구두 등이 보이고, 현대인의 고민과 갈등을 담고 있다. 그의 그림의 또 다른 묘미다. 박민준 그림은 완벽하다. 아이러니하게 그의 그림은 완성도가 너무 뛰어나 그림에서 회화의 미래를 읽어내기 어려울 정도다. 너무 완벽해 이 작가가 다음에 무슨 그림을 더 그릴 수 있을 것인지 걱정이 된다. 숨이 막힐 듯 작게 쪼개 놓은 빛, 붓질 하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피부,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건물·풍경 등은 화면을 응시하는 사람들의 숨통을 틀어막는다. 이런 그림을 그려내기 위해 작가는 고단하고 지난한 육체의 한계를 넘어 치열하게 작품을 마주 대했을 것이다. 낮과 밤을 잊어버리고, 배고픔도 잊어버린 채 철저히 작업에 몰입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의 작품은 세밀하다 못해 정밀하다. 보면 볼수록 놀라움은 경외심으로 전환된다. 동시에 박민준 회화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는 사라져 버린다. 지금의 이 숨막힐 듯한 완전함에 미래가 보이지 않는 이 황당함.



 2012년 서울로 돌아온 그의 작품에서 드디어 나는 박민준의 미래를 보았다. ‘Fandango’라는 제목이 붙은, 새로운 화법으로 그린 작품 3점에서였다. 그림 속의 남자는 활을 들고 있다. 누구를 겨누어야 하는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따라서 아무런 원한도 가질 수 없는 어떤 상대에게 활을 겨누어야 하는 인간 세계의 부조리함. 예를 들어 함흥 출신 청년과 대구 출신 청년은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으므로 원한이 있을 리 없는데,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에서는 반드시 누군가는 누군가를 죽여야만 생존이 가능했다. 이 엄청난 부조리는 스포츠에서도 비일비재하다.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일본의 권투 선수와 한국의 권투 선수는 링에서 처음 대면하지만 승자가 되기 위해 서로를 무참히 두드려 패야 한다. 박민준의 신작에서 나는 이 엄청난 부조리 앞에서 쓸쓸히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고뇌에 찬 인간의 내면을 보았다. 그리고 비로소 박민준의 붓질이 꼬였다. 치밀함에서 우로 한 클릭 정도 이동한 여유. 이것이 박민준 그림의 미래다. 그는 또 한 번의 성공적인 전시를 마치고 표표히 뉴욕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예술에 몰입하는 텅 빈 작업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고, 그는 새로운 그림을 그릴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끝없이 애잔한 아쉬움의 다른 이름이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심연의 아쉬움과 창조의 영감을 제공할 것 같은 그 그림 앞에서 나는 또 충동구매했다. 매일매일 맞닥뜨리는 부조리함에서 나에게 구원을 줄 것 같은 그림을 어떻게 안 살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비로소 박민준의 다음 작품을 설레도록 기대하게 됐다. 부디 험난한 여정을 통과해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으면 한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다음 전시에도 내가 살 만한 정도의 가격이었으면 하는 이 부조리란 뭐지.



서연종 하나은행 삼성역지점장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