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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소원을 말해봐

중앙일보 2012.04.12 00:00 종합 36면 지면보기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소원이 하나 있었다. 통일이나 훌륭한 대통령 탄생 같은 거국적인 게 아니다. 남편이 정성껏 만들어준 선반 위에, 예쁜 화분 얹어놓는 것이 결혼 후 지금껏 품어온 소원이다. 별것 아닐 수도 있는 그 일이 소원까지 된 것은, 집안일 도와주는 걸 제일 싫어하는 남편을 둔 탓일지도 모른다.



 지난 주말, 홈쇼핑에서 빨래건조대 풀 세트를 샀다. 이름값이라도 하듯이 박스를 풀어 펼쳐놓으니 거실 바닥 하나 가득이다. 50피스는 넘어 보인다.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침밥 먹은 게 소화가 안 돼서 그러니 조금 있다가 해준다며 소파에 누워 아이패드를 뒤적거리다가 금세 코를 골며 잔다. 혼자서 한 시간이나 걸려 조립을 마쳤다. 완성된 건조대 위에 빨래를 널며, 누워 자는 남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자기는 하기 싫고, 쩔쩔매며 하고 있는 내 얼굴 보기는 차마 미안하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가 잠이 든 행색이다. 흔들어 깨웠다. “다 했어. 일어나도 돼. 오늘 당구대회 있다며. 가서 하고 와.” “벌써 다 했어? 깨우지 그랬어. 도와주지 않고 나가도 돼?” “나 혼자 할 거 많아. 올 때 피자나 한 판 사와.” “고래? 알았어. 내가 젤 맛있는 걸루다 두 판 사올게.”



 혹여 마음이 변해 잡을까봐 부릉대며 쏜살같이 도망가는 남편 차를 바라보며 한참을 웃었다. 그동안은 저런 모습 볼 때마다 열불이 나더니만,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나도 이제 늙었나 보다. 얼마나 하기 싫으면 저럴까.



 언제던가. 재활용 박스 좀 치워달라고 했다가 98만원을 날린 적도 있다. 커다란 박스들이 부담스러워 현관 앞에 놓고는, ‘접어서 서울 갈 때 경비 아저씨께 드리라’고 했다. 하루 이틀 사흘. 못 본 척이다. 참다못해 외출하는 사람을 불렀다. “나도 다 생각하고 있었어. 낼 해줄게. 오늘은 약속 늦어 안 돼.” 그냥 간다. “딱 3분이면 돼.” 내 말에 찜찜했는지 다시 들어와 박스를 챙겨 나갔다. 잠시 후 밖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서 뛰어나가보니 집 앞 커다란 철근 구조물과 부딪쳐 차가 찌그러진 채 서 있다. 한쪽이 몽땅 나갔다. 나 때문이란다. 급한데 내가 성화를 부려서 그렇게 되었단다. 레커차 트럭 위에 얹힌 찌그러진 차도 나를 원망하는 것만 같았다. 그때 들어간 돈 생각만 해도 속상하다. 그 후론 커다란 박스도 내가 온몸을 던져서 누르고 접어 해결한다. 시키려고 부르다가, 그냥 한다.



 목욕탕 하수구에 문제가 생겨 고쳐 달라 했다가 뭘 만졌는지 관이 터져서 사람을 부른 적도 있다. 잘 고치면 또 시킬까봐 일부러 망쳐놓은 것 아닌가 한동안 의심한 적도 있었지만 결혼 후 지금까지 한결같은 걸 보면 아무래도 천성인 것 같다.



 다행히도 경제적인 책임감은 투철하기에 대충 용서가 되기는 하지만 집안일이라면 꽁무니를 빼는 그의 속마음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돈 벌어 온다고 집안일 하나도 안 하고 유세를 떠는 건가, 아님 원래 그런 일을 죽도록 싫어하는 건가.’



 낼모레면 같이 산 지 34년. 이제는 아무래도 ‘집안일 하기를 죽도록 싫어하는 사람’으로 결론을 내려야 할까 보다. 누구에게나 죽도록 하기 싫은 일은 있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몇 년 전, 엄마가 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다. 간병을 이유로 엄마와 이틀을 함께 잤다. 그때 보니 간병하는 남자들도 꽤 많더라. 수술한 부인을 간병하느라 침대 밑 딱딱한 의자에 누워 밤새도록 애쓰는 남편. 화장실 출입 못하는 할머니를 위해 소변기를 엉덩이 밑으로 넣었다 뺐다 하시더니 소변기를 깨끗이 씻어 말리시던 할아버지. 세상 참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아프면 내 남편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궁금해서 물었다. ‘난 저런 거 못해. 밖에 나가서 뼈 빠지게 돈 벌어 유능한 간병인을 고용해 줄게’ 한다.



 시장에서 혹은 식당에서 공수해 온 음식들로 가득 채워진 밥상을 받고 앉아있는 기분이다.



 사람을 쉽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내가 그동안 너무 오만했던 것 같다.



 어차피 하지 않을 집안일. 맘이라도 편하게 살게 이제부터는 눈치 주지 말아야겠다.



 선반 만드는 일이나 간병하는 일이나 전문가의 손길이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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