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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아 여론 女論] 100년 전의 경찰은

중앙일보 2012.04.12 00:00 종합 37면 지면보기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오냐, 죽고죽고 또 죽고 만 번 죽을지라도 너같이 개 같은 놈에게 실절(失節)은 아니하겠다.”/그 말에 소년의 악심이 더욱 심하여 말이 막 그치자 번쩍 들었던 칼을 그대로 푹 찌르는데, 별안간 한 모퉁이에서 어떤 사람이, “이놈아, 이놈아!” 소리를 지르며 급히 쫓아오는 바람에 소년은 깜짝 놀라 여학생 찌르던 칼도 미처 뽑을 새 없이 삼십육계의 줄행랑을 하고(…) 행순하던 순사가 두어 마디 이상한 소리를 듣고 차츰차츰 오다가 이곳에 다다르매 꽃봉오리 같은 여학생은 몸에 피를 흘리고 땅에 누웠고, 그 옆에는 어떤 청년이 손에 단도를 들고 섰으니 그 청년은 갈 데 없는 살인범이라. 순사가 그 청년을 잡고 박승을 꺼내더니 다짜고짜로 청년의 손목을 척척 얽어놓고 호각을 호루록 호루록 부니, 군도(軍刀)소리가 여기서도 제걱제걱하고 저기서도 제걱제걱하며 경관이 네다섯 모여들어 여학생은 급히 병원으로 호송하고 그 청년은 즉시 경찰서로 압거하니…(최찬식, 『추월색』, 1912)



 개화기 소설에서는 여주인공들이 집 밖에 나갔다가 겁탈의 위험에 처하곤 했는데, 『추월색』은 그러한 소설들 중에서도 겁탈의 위기가 매우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작품이다. 오랫동안 ‘정임’을 스토킹하던 ‘한영’이라는 자가 일본 우에노(上野) 공원에서 정임을 겁탈하려다 여의치 않자 그녀를 칼로 찌른다. 이때 정임의 약혼자였으나 어릴 적 사고로 헤어졌던 ‘영창’이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이 상황을 보고 쫓아오고 한영은 도망친다. 그 순간 이곳을 순찰하던 순사에 의해 영창이 범인으로 오해를 받아 포박되는 장면이 위의 인용된 부분이다.



 이후 이 소설에서 영창의 누명은 곧 벗겨지고 진범인 한영도 검거되며 칼에 찔린 정임도 빠른 응급조치로 목숨을 건진다. 조선 땅에서 수년 전에 소식도 끊겨버렸던 남녀가 우여곡절 끝에 일본 한복판에서 가장 위급한 순간에 재회하게 된다는 스토리는 실로 우연적이기 그지없지만, 이 시기 소설에서는 대부분 이처럼 주위의 도움으로 여성 주인공이 구사일생한다. 그리고 이들 남녀 주인공의 해피엔딩에 경찰들의 치안도 도움이 되곤 한다. 물론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친일적 성격을 무시할 순 없으나, 그 시절 소설에서는 적어도 여성이 주위의 무관심이나 경찰의 늑장 대응 따위로 성폭행이나 살인을 당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는다.



 며칠 전 수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당시의 녹취록이 공개되어 국민들을 충격에 빠트리고 있다. 아깝게 스러져간 한 여성의 마지막 비명과 절규가 들리는 듯해서 오래도록 가슴이 먹먹했다. 100년 전 정임을 구해내던 그런 경찰들을 2012년의 우리는 기대해볼 수 없는 것일까.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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