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장 나간 남편에게 띄운 “당신 하나밖에 없어요”

중앙일보 2012.04.11 00:00 종합 27면 지면보기
바스러질 듯 빛바랜 봉투 속 사연은 갈 곳을 잃었다. 하지만 그 속에 켜켜이 쌓인 마음은 편지를 눌러쓰던 그 순간 그 심정 그대로였다.


한국전 때 미군이 노획한 북한군 편지 책으로 엮어

포화가 난무하는 전장을 오간 편지에는 혈육의, 정인(情人)의 애끓는 그리움과 사랑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쓰인 북한군의 편지를 엮은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삼인·사진)에는 수취인에게 닿지 못한 채 62년의 세월 동안 봉인돼 있던 수많은 마음이 펼쳐졌다.



책은 미국 워싱턴 인터내셔널센터 키손(Korea Information Service on Net) 프로젝트의 이흥환 선임편집위원이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 서고에서 발견한 조선인민군의 편지 1068통 중 가려낸 113통을 엮은 것이다.



1950년 9~10월 오간 이 편지들은 미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당시 노획한 것으로 77년 NARA가 비밀을 해제해 일반에 공개됐다.



 상대는 있지만 편지는 내밀한 이야기다. 그런 까닭에 지면에 배어나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전쟁의 고단함은 맨 얼굴로 독자 앞에 선다. 저자의 말대로 이 편지들은 “사랑, 원망, 분노, 번뇌, 탐욕, 이기심, 고뇌가 한꺼번에 여과 없이 노출된 한 시대의 증언대”였다.



 글은 멋 내지 않고 젠체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은 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 하나밖에 없습니다”라며 전장에 나간 남편에게 보낸 아내의 편지는 화려하진 않지만 사랑의 깊이를 짐작케 하고 “후방 일은 생각지 마라. 후방에는 내가 있다”며 아우를 다독이는 형의 서신에는 어느새 마음이 훈훈해진다. 발싸개를 사서 빨리 면회 오라며 떼쓰는 한 병사의 편지를 읽을 때는 전쟁의 최전선에 서 있던 그 또한 오늘을 사는 한 젊은이와 다르지 않았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들 편지 묶음은 역사 기록으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



저자는 “이 편지들은 개인 사이에 오간 사신(私信)이지만 헝클어졌던 한국 현대사의 한 시기를 보여주는 1차 사료의 역할을 충분히 한다”며 “딱딱한 역사서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한 시대의 증언”이라고 평가했다. 저자의 바람은 이들 편지가 60여 년 만에 제 주인을 찾아가는 것이다. 현재 이 편지들에 대한 소유권은 미국 정부에 있다.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