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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주권과 국익이 만났을 때

중앙일보 2012.04.11 00:00 종합 32면 지면보기
김종수
논설위원
중국 산시(峽西)성 시안(西安)시의 가오신(高新)기술산업개발구는 아직 잡초만 무성한 황량한 모습이다. 그런데 시내 곳곳에는 ‘삼성의 반도체 공장 투자를 환영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가 가오신 개발구에 70억 달러를 들여 낸드플래시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기 때문이란다. 산시성 정부는 삼성전자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용수와 물류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준 것은 물론 공장 전역을 보세구역으로 지정해 각종 세제 및 금융지원을 해줄 계획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삼성전자가 반도체 공장을 짓고 160여 개 협력업체가 입주하면 이 지역에 무려 1만 개 이상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같은 초우량 기업의 투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산시성뿐만 아니라 전 세계 지방정부의 꿈이다.



 지난 4일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클럽에서는 200여 명의 거물급 투자자들이 몰린 가운데 한국 투자설명회가 열렸다. 당초 100명 정도가 참석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발효를 계기로 한국 투자에 대한 미국 기업들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참석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는 후문이다. 이날 현장에서 6건, 4억2700만 달러 규모의 투자 약속이 이뤄지기도 했다. 정부가 뉴욕에서 투자설명회를 연 이래 최고의 실적이라고 한다. FTA의 효과가 무역부문보다 투자 쪽에서 먼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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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에 앞서 지난달 21일 한국·중국·일본은 3국 간 투자보장협정(BIT)에 가서명했다. 한·중·일 FTA에 앞서 3국의 기업들이 역내 투자를 활발하게 할 수 있도록 투자보장협정을 먼저 맺기로 한 것이다. 투자보장협정은 외국에 투자하는 기업들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도록 그 권리를 국가 간 협정으로 보호해 주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미 FTA의 투자 관련 조항과 거의 같은 내용의 투자자-국가 소송제도(ISD·Investor-State Dispute)가 들어 있다. 야당과 일부 시민단체가 한·미 FTA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이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ISD 말이다.



 오늘 총선을 앞두고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총선연대 공약으로 한·미 FTA 폐기를 내걸었고, 이를 다짐하는 공개서한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기까지 했다. 이것이 총선 민심의 역풍을 맞자 민주당은 폐기가 아니라 재재협상이라며 슬그머니 물러섰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폐기 공약을 철회한 것은 아니다. 진보당은 여전히 한·미 FTA 폐기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지금은 한·미 FTA 폐기 주장이 사찰 파문과 막말 후보 논란에 밀려 총선의 이슈에서 밀려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거나 진보당이 약진하면 한·미 FTA 폐기 논의는 어떤 식으로든 다시 불거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ISD는 야당이 한·미 FTA 폐기의 가장 중요한 논거로 드는 조항인 만큼 과연 그토록 심각한 국익의 훼손인지를 다시금 따져봐야 할 이유다.



 ISD 조항은 한·미 FTA 발효 이후 3개월 내에 ‘서비스·투자위원회’를 통해 재협의를 할 수 있다는 방침에 따라 현재 민관 전문가 위원회에서 검토작업을 벌이고 있다. ISD에 관해 제기된 문제점은 여러 가지이지만 대체로 ‘우리나라의 주권을 침해할 소지가 크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미국 투자자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제기구에 중재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행정부는 물론 사법부의 권한마저 손상시킨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주권 침해’라고 하면 없던 애국심마저 솟구칠 정도로 민감하다.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도발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그렇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국민의 건강주권 침해’라는 선동적인 주장에 적지 않은 시민들이 촛불시위 대열에 합류한 것 또한 그렇다. 독도 문제에 대한 국민적 반발은 ‘주권 침해’에 대한 합당한 우려이지만, 쇠고기 촛불시위는 ‘주권 침해’에 대한 근거 없는 괴담에 현혹된 것이었다. 우리 국민은 ‘주권’에 관한 한 이유를 불문하고 유별나게 예민한 것만은 사실인 듯싶다.



 그렇다면 ISD는 어떨까. 사실 투자를 하는 쪽에선 가급적 보호의 수준을 높이려 하고, 투자를 받는 쪽에선 덜 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ISD는 그 타협의 역사적인 산물이다. 그간 수많은 자유무역협정과 투자보장협정을 거치면서 국제적으로 거의 표준화된 투자분쟁 조정제도로 정착된 것이 ISD인 것이다. 그렇기에 한·중·일 투자보장협정을 비롯해 전 세계 각국이 맺은 2600여 개의 투자보장협정과 300여 개 FTA에 ISD가 포함된 것이다. 한·미 FTA의 ISD가 일방적인 주권 침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다. 특히 외국인 투자 유치가 각국 정부가 공들여 추진하는 핵심적인 정책이 되면서 외국인 투자에 대한 보호장치는 오히려 더 강화되는 추세다.



 더욱이 우리나라처럼 해외로 나가는 투자가 국내로 들어오는 투자보다 많은 나라 입장에선 투자에 대한 보호 수준을 더 높이는 게 국익에 부합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직접투자 유·출입을 보면 최근 수년 동안 일관되게 해외투자가 국내로 유입되는 외국인 투자보다 현격하게 많았다. 그렇다면 해외로 나가는 국내자본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내에 외국인 투자를 더 끌어들이기 위해서도 투자의 보호수준을 높이는 게 국익에 유리하지 않겠는가. ISD는 주권의 문제가 아니라 국익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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