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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427> 다시 보는 서울성곽

중앙일보 2012.04.06 00:56 경제 13면 지면보기
윤창희 기자
남산 정상에는 돌담이 하나 있다. 사적 제10호인 서울 성곽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남산에 성곽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냥 지나친다. 서울시가 이런 서울 성곽(한양도성) 알리기에 나섰다. 지난달에는 종로구 혜화동 시장 공관 주변 86m 구간에서 서울성곽 복원공사를 시작했다. 앞서 1월에는 성곽길 21㎞ 구간에 종합 안내판과 화살표 표지판도 설치했다. 서울시는 또 서울성곽 세계문화유산(유네스코) 등재 작업도 준비하고 있다. 514년간 유지해온 서울성곽의 역사에 대해 알아본다.


태조가 쌓은 18.6㎞ 성곽, 전차길 만들며 훼손 10.5㎞까지 줄어

왕권강화를 위해 건설한 서울성곽



옛 남산식물원터를 지나면 성곽이 나타난다. 탐방로 바깥쪽으로 나가면 이끼가 뒤덮여 푸른빛이 도는 성곽과 함께 남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중앙포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태조는 경복궁과 종묘가 완성된 이듬해인 1396년 서울성곽을 쌓았다. 농한기인 1∼2월 49일 동안 전국에서 11만 8000명을 동원했다. 주로 영호남과 강원·평안·함경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었다. 경기·충청·황해도 거주민들은 바로 전 해에 궁궐 공사에 차출됐기 때문에 면제됐다.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도 국방의 임무를 고려해 동원하지 않았다. 당시의 공사로 서울성곽은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 등 이른바 내사산(內四山)을 잇는 총 길이 18.6㎞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몇 달 뒤 가을 농한기인 8∼9월에는 7만9400명이 동원돼 49일간 2차 공사를 벌였다. 이때는 봄에 쌓지 못한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고, 성곽의 통로인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지었다.



당시 태조는 성곽을 지으면서 ‘포악함을 막아 백성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태조가 대외적으로는 외적의 공격을 막는 기능을 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국토를 지키는 조형물로서 조선의 상징물로 삼았다고 분석한다.



이후 27년이 지난 세종 4년(1422)에는 대대적인 보수·정비 공사가 진행됐다. 1∼2월 38일 동안 전국에서 32만 명이 동원됐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10만 명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공사였다.



서울성곽은 본래 도성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았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제 구실을 못했다. 이런 이유로 선조의 손자이자 16대 왕인 인조는 서울성곽과는 별도로 남한산성과 강화도 산성을 수축했다.



1704년 숙종은 6년에 걸쳐 대대적으로 성곽을 정비했다. 이때 북한산성도 수축해 도성의 방어체제를 만들었다. 이것이 근대사회로 오기 전까지 이전의 서울성곽이다.



근대화와 함께 서울성곽도 시련기를 맞는다. 1899년 성문 안으로 전차가 드나들게 된다. 이후 1907년∼1908년 복선화가 추진되면서 숭례문과 흥인지문의 양쪽 성곽이 헐렸다. 이어 일제는 도로 개설을 위해 1913년에 남산과 장충동 사이 남소문 터 구간의 성벽을 헐었다. 1914년에는 서소문이, 1915년에는 돈의문이 헐렸다. 1928년과 38년에는 혜화문과 광희문의 성벽이 헐렸다. 이렇게 해서 총 길이 18.6Km 중 산지 성곽 10.5Km만 남게 됐다.



이후 1975년부터 복원이 시작됐고, 현재 인왕산·남산·숭례문 구간의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다. 서울시장 공관 구간(86m)과 흥인지문 북쪽 동대문 성곽공원 구간(21m)도 계획대로 복원되면 원형 복원이 가능한 총 13.5㎞ 구간의 성곽이 모두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나머지 5.1㎞ 구간은 사유지이거나 도로여서 사실상 원형 복원이 어려운 상태다.



4대문과 4소문



태조는 서울성곽을 지으면서 동서남북에 사대문을, 그 사이에 사소문을 두었다. 일명 도성 8문이다. 당시 지어진 8문은 다음과 같다.



▶정북: 숙정문(肅靖門) ▶정남: 숭례문(崇禮門·남대문) ▶정동: 흥인문(興仁門·동대문) ▶정서: 돈의문(敦義門·서대문)▶동북: 혜화문(惠化門·동소문) ▶서남 소덕문(昭德門·서소문) ▶동남 광희문(光熙門·수구문) ▶서북: 창의문(彰義門)이다. 성문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다. 도성 문에 유교 정치이념인 인의예지 4대 덕목을 결부시켜, 조선 왕조 수도의 상징으로서의 위상을 나타낸 것이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한성이 함락된 것을 계기로 동대문·남대문 2곳을 제외한 나머지 성문의 문루가 소실됐다. 이후 숙종과 영조 때 문루가 중건되는데, 숙정문은 여전히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 숭례문(남대문)=서울성곽 8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커 도성의 얼굴 역할을 했다. 숭례문 현판은 양녕대군의 글씨로 전해진다. 이 현판은 다른 도성문과 달리 가로로 쓰여지지 않고 세로로 돼 있다. 이는 오행사상에 따른 것이다. 예(禮)자는 오행의 화(火)에 해당하기 때문에 불이 타오르는 모양처럼 세워서 달았다는 것이다. 1962년 국보 1호로 지정된 숭례문은 2008년 2월에 화재로 훼손됐고, 현재 복원 공사(진행률 80%)가 진행 중이다. 오는 12월 일반에 공개된다.



● 흥인문·흥인지문(동대문)=보물 1호로 서울 성곽에서 유일하게 성문 외부에 옹성을 둘렀다. 옹성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곽을 보호하기 위한 반원 모양이다. 그러나 이 문은 임진왜란 때 왜적이 가장 먼저 입성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지금의 흥인지문 문루는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목조건물로 조선 말기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 돈의문(서대문)=돈의문은 일제에 의해 철거돼 지금은 볼 수 없는 문이다. 지금의 신문로 큰길과 정동에서 평동으로 통하는 길이 교차하는 마루턱에 위치했다고 전해진다. 돈의문은 이괄의 난과 을미사변 때 이용되기도 했다.



● 숙정문·숙청문(북문)=태조 5년 건립된 북대문은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북악산)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했다. 하지만 태종 13년 이래 경복궁의 좌청룡 지맥을 보존해야 한다는 풍수지리 사상에 의해 문이 닫혀 있어야 했다. 풍수학생 최양선의 상소로 북소문인 창의문과 더불어 폐쇄됐는데 북문이 열리는 때는 주로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행하는 시기뿐이었다.



● 창의문·장의문(자하문)=숙정문과 함께 풍수지리 사상에 의해 문을 대부분 닫아놨다. 세종 28년(1446)에는 아예 왕명으로 영구폐쇄 조치를 했다. 하지만 인조반정이 있던 광해군 14년(1623) 3월 12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은 세검정을 거쳐 이 창의문을 통해 창덕궁을 장악해 인조정권을 만들어 냈다.



● 혜화문(동소문)=영조 때 중건된 혜화문은 일제 때 철거됐다. 일제는 1928∼38년에 혜화문을 철거한 것으로 전해진다. 혜화문은 여진의 사신이 한양에 입성할 때 이용했던 문이다.



● 소덕문·소의문(서소문)=도성의 서남쪽에 위치해 강화·인천 방향과 서북방으로 직결되는 관문 구실을 했다. 소덕문 문루는 임진왜란 때 파괴된 뒤 영조 때 중건됐다. 소의문은 도성 안 백성들이 사망해 도성 서쪽 방향으로 운구될 때 이용하는 문이었다. 이 서소문 밖에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시전(市廛)인 칠패시전이 있어 상업활동의 중심 무대가 됐다. 소의문이 있던 자리는 현재 왕복 8차선의 서소문로가 조성돼 터를 확인할 수 없다.



● 광희문(수구문)=서쪽의 서소문과 함께 도성 내의 장례행렬이 동쪽 방향으로 지날 때 통과하는 문이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됐다가 숙종 때 재건됐다. 광희문은 1928년 혜화문과 함께 조선총독부에 의해 문루가 파괴된 채로 있다가, 1975년 복원됐다.



태조 땐 자연석, 숙종 땐 다듬은 돌

한눈에 성곽 축조 시기 알 수 있죠




서울성곽을 자세히 보면 재미있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서울성곽의 축조 시기별로 확연한 기술 차를 느낄 수 있다. 태조 5년(1396)에 축조된 성벽(위 사진)은 벌써 언뜻 봐서도 엉성한 느낌이다. 큰 메주만 한 크기의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다. 세종 4년(1422년)의 성벽(가운데 사진)은 장방형 돌을 기본으로 하면서 사이 사이에 잔돌을 쌓았다. 숙종 30년(1704년)에 쌓은 성벽(아래 사진)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모습니다. 2자x2자의 석재를 정사각형에 가깝게 규격화해 튼튼하게 쌓았다. 태조 때와 비교해 300년이 흐르면서 축적된 기술을 보여 준다.



서울성곽의 성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글자가 많이 새겨져 있다. 이는 누가, 어느 구역에서 일했다는 공사 실명제의 흔적이다. 천자문이 새겨진 구간은 태조 때 쌓은 구간이고, 도나 현의 이름을 새긴 구간은 세종때 쌓은 구간이다.



천자문이 적혀 있는 것은 성벽 축조 당시 공사 구역을 표시한 것이다. 서울성곽은 처음 쌓을 때 전체 5만9500척을 600척으로 나누어 총 97 구역으로 구획하고 천자문 순서로 표시했다. 북악산 정상에서 天地玄黃(천지현황)의 天(천)자로 시작해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弔民伐罪(조민벌죄)의 弔(조)자로 끝난다. 성벽 구역 곳곳에는 辰字終面(진자종면·진자구역 끝지점)이나 崗字六百尺(강자육백척·강자구역 600척) 같이 각 구역을 표시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 조선 팔도 각 지역에서 인원을 동원했기 때문에 도나 현의 담당 지역을 표시했다. 宜寧始面(의령시면·경상남도 의령 시작 지점), 흥해시면(興海始面·경상북도 포항시 흥해 시작 지점) 등의 글씨가 성벽 돌에 새겨져 있다.



이런 공사 실명제는 이후에도 계속돼 후대에는 아예 감독관의 직책과 이름 및 날짜가 기록된 것도 있다. 청운대 부근 성벽에 새겨진 글자도 공사 실명제를 했음을 보여준다. ‘가경 9년(1804) 갑자 10월일(嘉慶九年甲子十月日) 패장(牌將) 오재민(吳再敏), 감관(監官) 이동한(李東翰), 변수(邊首·기술자·편수) 용성휘(龍聖輝)’로 업무별로 담당자의 이름을 기록했다. 이는 공사가 부실할 경우 담당자에게 재공사를 명령하는 근거로도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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