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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의 시시각각] 공부 안 한 선거공약

중앙일보 2012.04.06 00:38 종합 34면 지면보기
양선희
논설위원
우리나라 재벌의 관행, 분명 문제 있다. 올 초 시끄러웠던 재벌가 자녀들의 ‘빵집 전쟁’은 모험심과 도전정신은 없이 쉬운 돈벌이를 쫓는 그들의 의식 단면을 보여줬고, 잊을 만하면 한번씩 터지는 재벌 패밀리의 비자금 소식은 늘 억대도 아닌 수천억대라니 듣는 것만으로도 위화감이 절로 든다. 일자리가 화두인 요즘 대기업들이 계약직·파견직·사내하청 등 인력구조를 값싸고도 자르기 쉽게 만드는 현란한 고용기술을 발휘하는 모습은 딱 잘라 뭐라 말하긴 어려운데 찜찜하다. ‘적은 지분에 과도한 의결권을 행사하는 지배구조’와 같은 어려운 얘기까지 하지 않아도 재벌은 이렇게 일상적인 데서 열 받게 한다.



 그러다 보니 ‘재벌개혁’을 한다면 누구나 찬성이다. 정치권이 선거철만 되면 ‘재벌개혁’ 공약을 단골메뉴로 올리는 이유다. 이번 총선에도 이 레퍼토리는 반복된다. 그러다 정운찬 전 총리가 동반성장위원장 직을 사퇴하며, 전국경제인연합회 해체를 언급했다. 그의 행보가 대선으로 직행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분분한 것으로 보아 그가 대선에 나선다면 최일선 공약은 ‘재벌개혁’이 될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정치권의 재벌개혁 실체는 무엇인지 보려고 선거 공약을 뜯어봤다. 그런데 이렇게 황당할 때가….



 ‘30대 기업집단을 3000대 전문기업으로 만들겠다.’ 통합진보당의 재벌개혁 공약이다. 현재 30대 그룹 계열사를 통틀어도 1000개 남짓이다. 기본적인 통계조차 확인하지 않고 공약을 내건 것이다. 민주통합당은 출자총액 제한을 부활하겠단다. 다 아는 얘기지만 이 제도는 노무현 정부에서 대폭 완화되고 유명무실해졌다. 또 정치권은 입을 모아 ‘재벌규제를 완화했더니 경제력 집중이 심해졌다’ ‘재벌이 양극화의 주범이다’ ‘재벌이 쉽게 돈 버는 일에만 몰두한다’는 등으로 개혁의 당위성을 주장한다. 그런데 경제 문제에 감성적 구호만 있을 뿐 경제력 집중이 어느 정도 악화됐는지, 재벌의 양극화 기여도는 어느 정도인지 기본적인 데이터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기업집단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그들의 대답. “노무현 정부 때만 해도 재벌에 관한 연구와 논문이 많았는데, 요 몇 년간 연구모임도 논문도 거의 없었다.” “정치권이 주장하는 규제 근거가 될 만한 데이터가 무엇인지 나도 궁금하다.” 한마디로 현재 공약의 구체적인 근거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어떤 정책도 구체성이 없으면 실현되지 않는다. 하물며 나라 경제를 지탱하는 기업 관련 정책을 감상적이고 피상적으로 실행할 순 없다. 현재 정치권의 ‘재벌개혁’ 공약은 ‘선거용 립서비스’일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이 와중에 기업들은 낮은 자세를 보인다. 10대 그룹은 광고·물류 등에서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관행을 탈피하고 경쟁입찰을 도입해 18조원 정도를 중소기업에 흘려준단다. 이미 십수 년 전 약속했던 순환출자구조 해소 대책을 또 발표하는 기업도 있다.



 그러고 보니 이 광경, 무척 낯이 익다. 총선·대선 등 선거철만 되면 정치권과 대기업들은 ‘푸닥거리’ 하듯, 정치권은 ‘재벌개혁’을 외치고 대기업은 ‘자체 쇄신과 반성’을 발표하곤 했었다. 그리고 선거가 끝나면, 그들은 모두 평화롭게 공존했다. 다음 선거철까지.



 하지만 과거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 다보스 포럼에서조차 ‘시장경제’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나오는 판국이니 우리나라의 경제구조도 분명 달라져야 할 것이다. ‘재벌개혁’ 문제도 선거철 메뚜기 같은 공약으로 끝낼 일은 아닌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먼저 재벌이 바뀌어야 한다. 순환출자구조 해소는 외환위기 당시부터 권고된 구조조정 사항이었다. 더 이상 이슈화될 때마다 무마하는 식의 발표만 하며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 그리고 정치권도 정말 재벌개혁이 우리 시장질서를 정상화하는 방안이라 믿는다면 좀 더 정치(精緻)하게 공부하고 접근해야 한다. 재벌 타도 기치만 세우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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