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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전 국내 첫 헌법재판 논쟁 … 대법관이 e-메일 쓴 까닭은

중앙일보 2012.04.06 00:20 종합 27면 지면보기
양창수 대법관(左), 김영희 대기자(右)


대법관과 대기자는 우리 사회의 최고 지성이다. 현직 대법관과 대기자가 한 통의 e-메일을 계기로 65년 전 국내 최초의 헌법재판 논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양창수 대법관,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 평전 읽은 뒤 편지



 한국의 민법분야 최고 권위자로, 2008년 서울대 교수에서 대법관에 임명된 양창수(59·사법시험 16회) 대법관과 언론인 경력 54년째인 중앙일보 김영희(76) 대기자 사이에 최근 벌어진 소설 같은 일이다.



 두 석학의 시간을 거스른 지적 탐험은 지난 1월 3일 양 대법관이 김 대기자에게 e-메일을 보내면서 시작됐다.



 양 대법관은 e-메일에서 “뵌 적이 없는 사람이 불쑥 서신을 드려 죄송하다”고 운을 뗀 뒤 “이번에 대기자께서 집필하신 유민(維民) 홍진기(1917~86) 전 중앙일보 회장의 평전(『이 사람아, 공부해』 지난해 11월 출간)을 들추다가 생각나는 바가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글을 올린다”고 적었다. 이어 양 대법관은 자신이 1999년에 쓴 논문(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재판논의ㅡ처의 행위능력 제한에 관한 1947년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서울대 법학 40권 2호, 125면 이하) 내용을 소개했다.



 논문에 따르면 1947년은 해방과 건국의 사이, 그래서 대한민국의 헌법이 제정되지 않은 미 군정 시절이었다.



홍진기 전 회장
 당시엔 일제강점기 때 법률이 원칙적으로 효력을 가졌다. 그 중에는 “처는 부(남편)의 동의를 얻지 않고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의용(依用)민법 14조’(일제의 법률을 준용한 민법)도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처가 남편의 동의를 얻지 않고 타인을 상대로 가옥인도청구소송을 제기한 사건이 원고승소판결이 내려진 뒤 대법원까지 올라왔다.



 5명으로 구성된 대법원 민사부는 심리 끝에 1947년 9월 2일 “민법 14조는 남편에 대해 우월적 지배권을 부여한 것인데 이는 해방 이후 민주주의 이념 정착이 ‘국시(國是)’인 상황에서 성(性)의 구별로 인해 생긴 차별적 제도를 인정하는 취지”라며 “처의 행위능력을 제한하는 민법14조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당시로선 획기적 판결(1947민상제88호)이었다.



 이 판결이 나오자 해방정국의 법조계가 발칵 뒤집혔다. 기라성 같은 법률학자들이 참여한 대법원의 헌법재판권한 논쟁이 47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뜨겁게 이어졌다.



 김갑수 미군정청 사법부 사법조사국장, 김안진 고려대 법정대학 교수, 황성희 서울지방심리원 심판관(현재의 서울지법 판사), 김증한 서울법대 교수 네 명은 반대하는 이론을 폈다. 그들은 대법원 판결에 대해 “사법권에 의한 입법권의 침해”(김갑수), “헌법이 존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대법원이 법률의 실효를 선언하는 것은 부당하다”(김증한)는 등의 지적을 했다. 한마디로 대법원에 헌법재판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홍진기 미군정청 사법부 법률조사국 법무관과 장후영 변호사(법률관계 정기간행물인 ‘법정’ 발행인) 두 명은 대법원 판결을 적극 지지했다. 특히 홍 법무관은 1947년 11월 ‘법정’에 쓴 ‘사법재판소의 법률심사’라는 글에서 ‘생성중인 국가(state in the making)’라는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현재의 조선은 ‘생성중인 국가’로 이중적 존재다. 그러므로 실질적 의미의 헌법은 건국이념, 즉 민주주의다”라고 설파했다. 따라서 “대법원이 민주주의 이념에 어긋나는 민법 14조에 대해 무효를 선언한 것은 정당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 연방대법원이 1803년 마베리 대 매디슨(Marbury vs. Madison) 판결을 통해 스스로 헌법재판권을 획득한 사례를 들면서 대법원의 헌법재판권을 옹호했다.



 대한민국 헌법 교과서는 위헌법률심사제도의 연혁에 대해 1948년 7월의 제헌헌법 제81조 제2항을 그 첫 걸음으로 설명하고 있다. 양 대법관은 “그런 점에서 47년의 논쟁은 우리 민법사의 숨겨진 한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당시 논의의 열기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전해오는 것 같다. 해방후의 비상한 상황에 처한 건국일꾼들의 지적 흥분이 배경에 있었다”며 “홍 회장의 글이 그 당시에도 ‘찬성론 중의 백미’라고 평가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홍진기 회장 평전에는 이런 논쟁이 “‘법정’에 게재된 논문의 하나”라고만 간단히 언급돼 있었다. 양 대법관은 e-메일에서 이런 점을 지적했고 논문을 그대로 복사해 김 대기자에게 보냈다.



 김 대기자는 최근 펴낸 평전 개정판에서 당시 법률 논쟁을 상세히 소개했다. 이를 계기로 대법관과 대기자는 직접 만나 심도 있는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진리를 탐구하는 대법관과 한 평생 팩트(사실)를 추구해 온 대기자가 17년의 나이차를 뛰어넘어 지적으로 소통한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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