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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수의 싱가포르뷰] 일본, 생존 위한 해외 기업 사냥 … 한국 기업엔 위기

중앙일보 2012.04.03 00:25 경제 9면 지면보기
싱가포르의 쇼핑 중심지인 오차드 거리에는 엄청나게 큰 백화점이 있다. 일본 다카시마야 그룹이 24년 전 설립한 백화점이다. 오차드 거리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이 백화점이 들어섰던 1988년은 일본 기업의 공격적인 해외 자산 인수가 정점에 있을 때다. 그 시절 일본 기업은 미국 경제의 상징과도 같았던 뉴욕의 록펠러 센터를 인수해 미국인을 당황하게 했다. 그러나 그 직후,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맞았다. 지난해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한 해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시장에서 연일 이어지는 일본 기업의 해외 기업 인수 뉴스는 마치 24년 전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 일본 기업의 해외 투자가 젊은 신흥부자의 화려한 명품 수집 같았다면, 최근의 인수 형태는 은퇴한 부자노인이 남은 돈을 모아 후손을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 있는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는 점이다. 그만큼 요란스럽지 않고 대부분 실속 있는 투자다. 올 들어 시장에 발표된 일본 기업의 해외 자산 인수만 해도 이미 수십 건이 넘는다. 지난달에는 일본 최대 은행인 MUFJ가 미국 지역 은행인 퍼시픽캐피털을 인수했다. 앞서선 스미토모미쓰이가 영국의 스코틀랜드왕립은행(RBS)의 비행기 리스 사업부문을 72억 달러(약 8조원)에 인수했다. 일본 기업의 해외 투자도 활발하다. 얼마 전에는 혼다자동차와 샤프가 인도네시아에 대규모 공장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이렇게 일본 기업이 해외 투자에 열을 올리는 것은 ‘엔고’ 때문이다. 2007년 6월에 달러당 123엔 수준이던 엔화는 지난해 말엔 75엔대까지 진입하기도 했다. 일본 기업은 엔고를 내수 침체에 따른 저성장세를 타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해석하고, 신시장과 신사업을 찾아 해외로 나섰다. 여윳돈 투자가 아닌, 생존을 위한 투자가 진행되고 있다.



 엔화의 움직임은 한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미국 경기가 지금처럼 회복세를 이어간다면 엔화 약세는 불가피하다. 일본 기업과 경쟁하는 한국의 수출 기업이 지난 몇 년간 누려왔던 반사이익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 몇 주간 한국 시장에서 현대차 등 자동차 관련주가 약세를 보인 게 그 증거다.



 중장기로 보면 엔화 환율의 절대 수준이 관건이다. 최근 엔화가 약세를 보이고는 있지만, 지금과 비슷하면 일본 기업의 해외 진출은 ‘살기 위해’ 계속될 수밖에 없다. 1980년대부터 쌓아온 풍부한 해외 투자·진출 경험을 기반으로 일본 기업은 성공적으로 해외에 진출할 가능성이 크다.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한국 기업에는 위기다.



 금융위기 이후 세계 시장이 재편되고 있다.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 기업까지 시장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이들 국가보다 내수 시장도 좁고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기업은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은 10년, 20년 후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결정될 중요한 시기다.



한홍수 KIARA 주식부문 최고투자책임자(C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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