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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교동도에서

중앙일보 2012.04.03 00:15 종합 28면 지면보기
신승철
큰사랑노인병원장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에서 교동도 월선포까지는 코앞의 거리로 가까워 보이지만 뱃길로는 3㎞ 남짓이다. 페리호에 몸을 싣고 나니, 배는 코끼리처럼 서서히 뒷걸음질 치다가 뱃머리를 돌린 뒤 유유히 교동 쪽으로 움직여 간다. 어려서부터 낯익은 이 바다는 오래된 토장국 빛깔로 오늘도 이렇게 무연히 출렁인다. 전진하는 선체에 힘차게 부딪치며 질척대다, 맥없이 스러지는 파도의 기운들. 미끄러지듯 출렁이는 무량한 저 파도들을 응시하다 보면, 우리의 알량한 앎 따위는 어느새 무색해지고야 마는 것이다.



 먼바다 위론 해무(海霧)가 옅게 깔려 있다. 백치같이 밍밍해진 이 의식 위에, 하얀 그리움으로 몽롱하게 그려지는 먼 풍광이 정겹게만 느껴진다. 외로워 보이는 섬들. 침묵 속에 앉아 졸고 있는지, 깨어 있는 것인지 그 속내를 알 수가 없다. 해안가로 이어진 긴 갯벌. 거친 파도에 쓸리기를 수억 겁 해왔을 터다. 하나 어둠과도 익숙해진 빛깔로 저렇듯 담담하고, 적적한 기운만 남은 게 차라리 찬연(燦然)하다. 무구한 사랑의 표상처럼 수없이 반짝거리는 바다의 물비늘들. 저쪽 작은 목선이 하나 수평선을 향해 긴 꼬리를 남기며 빠져나가고 있다. 바다에 오면 누구든 한동안 그 풍경 속에 들어가, 그 풍경의 일부가 됨은 하나의 숙명이리라.



 어느새 월산포에 이르렀다. 작년에도 이 섬에 들러 섬 주위를 한 바퀴 돌아봤다. 단조로운 산책이었다. 한데 오늘은 무엇 하러 다시 또 찾게 되었는가. 여긴 내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이긴 하나 아마 갈수록 더 낯설어지는 무슨 섭섭함 같은 게 있어서인지 모르겠다. 여기 올 때마다 느꼈던 그 한가로운 고독이 좋아서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오늘은 화개산을 올라 길게 한 바퀴 둘러보고 싶었다.



 산 어귀 양지바른 곳엔 이름 모를 풀들이 드문드문 여린 잎들을 내밀고 있다. 꽃망울을 터뜨리고 싶어 하는 근심 어린 개나리들 작은 바람에도 흐느적거린다. 산길은 좁지 않고 지난해 넉넉한 인심처럼 수북이 쌓인 낙엽들은 푹 삭아져 이제 흙 속으로 동화를 하려 한다. 천천히 산을 오르다 숨도 돌릴 겸, 잠시 저 아래를 내려다본다. 넓디넓은 들판이 영상처럼 펼쳐진다. 파란색, 빨간색 양철 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들. 그 정경이 평화롭게만 보인다. 산정에 이르러 사방을 찬찬히 둘러본다. 가늠하기 어려운 너른 풍광이 조용히 내 안으로 스며들어 온다. 이 고요 속에 멀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까마득한 날의 내 어릴 적 추억도 함께 묻어온다. 무명(無明)의 황토 빛깔로 출렁이던 바다도 이렇게 멀리서 바라다보니 얌전한 청회색의 환한 물빛이다. 우아하면서도 소박한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여기선 하늘이 더 넓고, 더 웅장하게만 보인다. 둥그렇게 긴 수평선 따라 둘러앉은, 바다의 옛꿈 같은 흰 구름들. 시방 나는 이 고요 속에 머무르며 이 가슴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무상의 상념들을 흘려보내고 있다. 마음도 아닌 마음, 여기 빈자리엔 생명 그 자체의 숨결만이 자유롭다. 꿈만 같은 삶. 이 삶을 떠받치고 있는 순수의식만이 조용히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다. 지금 내겐 아무런 길도 보이지 않고, 어떤 성취도 의미 없어 보인다.



 어릴 적 나는 이런 고요 속에 머물다 귀가 멍멍해지면 혹시 이러다 미쳐버리는 건 아닐까, 두려워했던 적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삶의 본바탕 같은 이 고요에 머무름이 더없는 평안을 준다. 못물이 넘치는 듯 흥에 겨워 절로 독백도 흘러나온다. 커다란 침묵 속에 살아가는 굴참나무여, 으름나무여, 오동나무여. 모든 존재의 근본은 본디 하나 아닌가. 하늘과 땅과 나무와 바다와 뭇짐승들과 우리는 서로가 연결된 존재. 애초부터 우린 조건 없는 평등한 관계의 존재였다. 기쁨, 슬픔, 쾌락, 고통 이런 것들은 우리 삶의 뿌리들을 이루는 필연의 성분들이다. 인생이란 그 뿌리들로부터 자라는 하나의 생성의 나무이기도 하다. 번뇌란 번뇌하는 자의 몫일 뿐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의 희생자가 될 순 없다. 우리는 단지 서로 사랑하는 일에 의지해 살아갈 뿐이다. 이 섬과 저 섬 사이를 잇는, 햇빛 받아 희번덕이며 설레는 물빛의 긴 너울. 저건 아마 우리 그리움의 본래 고향일 것이다.



신승철 큰사랑노인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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