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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대통령, 더 이상 침묵해선 안 된다

중앙일보 2012.04.03 00:12 종합 30면 지면보기
총리실 불법 사찰 파문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청와대와 민주통합당은 어제 “노무현 정부 때 수차례 불법 계좌 추적을 했다” “사찰 관련자들이 청와대를 수시로 출입했다”며 정면충돌을 이어갔다. 이쪽저쪽의 주장만 춤을 추는 정치싸움으로 변질되는 양상이다.



 이번 사건을 지켜보는 국민의 심정은 착잡하다.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국회의원·재계인사·언론인은 물론 연예인까지 뒷조사했다고 한다. 해외 언론이 ‘한국판 워터게이트’로 보도하고 있다니 대외적으로도 체면을 구기게 됐다. 상황이 여기까지 온 데는 중앙일보를 포함한 언론의 책임도 있음을 고백한다. 언론이 제대로 취재를 했다면 문제의 문건들이 2010년 7월 검찰 수사 착수 후 1년 반이 넘을 때까지 수사기록 속에 묻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정확한 진상 규명이다. 지금 정부가 한 것이든, 과거 정부가 했던 것이든 사찰의 전모가 드러나야 국가 권력이 국민의 사생활과 머릿속을 훔쳐보는 불법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진상 규명의 주체를 놓고 새누리당은 특별검사제 도입을, 민주통합당은 특별수사본부 설치를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두 가지 모두 실효성과 신뢰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특검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고, 특별수사본부 역시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의 지휘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명박 대통령이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할 때라고 본다. 현 정부에서 일어난 사찰은 대통령의 출신 지역을 기반으로 한 ‘영포(영일·포항)라인’에 의해 주도된 것이란 의심을 받고 있다. 증거 인멸 및 은폐에 나선 것도 대부분 대통령 주변 인물이다. 이영호 전 고용노사비서관이 ‘자료 삭제를 지시한 몸통’을 자처한 가운데 전임 대통령실장과 공직기강비서관 등이 전직 주무관의 입을 막으려고 돈을 건넸다는 의혹이 제기돼 있다. 대통령이 철저한 진상 규명 의지를 밝히지 않는 한 어떤 방식의 수사든 제대로 진척되기 어려울뿐더러 그 결과를 신뢰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불법 사찰 문제를 외면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다량의 사찰 문건 공개 후 청와대 춘추관의 마이크를 잡은 이는 홍보수석이었다. 대통령은 어제 라디오연설, 수석비서관회의 등 공식 일정 속에서도 ‘최대 정치 이슈’에 관해선 일절 언급이 없었다.



 물론 대통령으로선 총선 직전에 돌출한 사찰 문건 파문에 휘말리는 것이 탐탁지 않을 수 있다. 추이를 지켜보면서 언제 입장을 표명할지 고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기를 놓치면 더 어려운 국면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직의 엄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길 바란다. 자신이 수반(首班)을 맡고 있는 정부 조직에서 빚어진 사찰 및 은폐 시도에 대해 이런 줄 몰랐다면 몰랐다고 말하고, 사과할 부분이 있다면 사과해야 한다. “다시는 불법 사찰 같은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선언과 함께 성역 없는 조사를 지시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국민이 대통령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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