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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금융 지원, 수산물 수출 앞장 … 어업인의 50년 친구

중앙일보 2012.04.02 08:59 부동산 및 광고특집 2면 지면보기
1. 1962년 4월 1일 수협중앙회 창립식에서 진행된 현판식. 2. 1975년 9월 23일 수협 공제병원선 새어민호 취항식. 3. 1985년 8월 21일 수협중앙회 가락동 지점 개점. 4. 1993년 12월 3일 오징어 많이 먹기 운동. 5. 2002년 3월 11일 수협 위성TV 방송 개국행사. 6. 2012년 3월 20일 제50기 정기총회를 마친 후 이종구 회장과 전국회원조합장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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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협 50년사
어촌 근대화 목적 62년 탄생
수산물 가공·유통·수출 도와
어업인 소득 향상 이끌어

현재의 수협은 어촌의 현안을 해결하고 식량 자급 등 어촌경제의 근대화를 촉진하기 위해 1962년 1월 20일 수산업협동조합법이 제정되면서 같은 해 4월 1일 설립한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로 탄생했다.



◆어업인 권익보호를 위한 위대한 첫 날갯짓(1960년대)=수협이 발족된 1960년대에는 자체조직과 사업기반 구축, 낙후된 어촌사회의 개발과 어업생산구조 개선을 위한 밑바탕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발족 당시 수협은 86개의 지구별 조합과 11개의 업종별조합, 2개 제조업조합 등 총 99개의 회원조합과 중앙회로 구성됐는데 수협은 당시 어촌에 산재해 있던 각종 계 조직을 수협의 계통조직으로 흡수하며 활동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업무적인 면에서도 1963년 5월 1일 산업은행과 농협중앙회로부터 수산 관련 자금을 인수해 여신업무를 개시했 다. 1965년 4월 16일에는 수산정책자금 일원화 조치에 따라 수협중앙회에서 수산자금을 취급할 수 있게 됐으며 5월 들어서는 어업용 유류 직배사업업무를 개시하며 어업인 지원을 위한 제반 여건을 충실하게 마련했다.



이 당시 수협은 직접 어업지도선(이화호)과 유조선(제1수협호)을 건조해 전국의 어촌을 돌며 어촌현장을 지원했다.



어업인에 대한 국가차원의 사기진작에도 아낌이 없었다. 1968년 11월 30일에 ‘어민의 날(4월 1일)’을 제정·공포하기도 했다. 이후 어업인들은 독자적인 기념일을 가지지 못하다가 수협 창립 50주년을 맞은 어제, 38년만에 ‘어업인의 날’이 부활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수협, 거침없는 성장(1970년대)=수협이 태동했던 1962년부터 1972년까지 수산업 부문은 국민경제보다 높은 연평균 11.5%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수협중앙회 조직도 이 시기에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다. 인력은 1962년 141명으로 출발해 1972년 909명으로 늘어났고 사업규모는 같은 기간 18억원에서 614억원으로 증가했다.



이와 함께 초창기 협동운동과정에서 일어난 시행착오와 모순 등을 과감히 시정해 효율적인 조직으로의 정비를 꾀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1973년 126개까지 늘어났던 회원조합을 부실한 조합과 행정구역 또는 경제권 중심으로 개편을 단행해 88개의 조합으로 축소했다.



한편 이 시기 수산물은 국가의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1978년 7월 27일 중앙회 수출 실적 1000만 달러를 돌파한 데 이어 그해 12월에는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수협은 수산업 성장을 발판으로 국제적인 협동조합운동에 동참했다. 1979년 3월 1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국제협동조합연맹(ICA)집행위원회에 참석해 만장일치로 회원가입 승인을 얻어냈다.



◆성년기 맞은 수협의 현대화·민주화(1980년대)=1980년대 성년기를 맞게 된 수협은 전산화로 업무처리에 혁신을 맞았다. 1981년 서울지역 고객 자동이체 업무가 개시된 것을 시작으로 다음해에는 중앙회 국고대리점 업무도 시작했다. 이후 통신의 발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1985년에 예금 온라인 업무, 양도성 예금증서 업무, 1988년에 신탁업무를 개시했다.



한편 이 기간 중 매년 안정적인 흑자를 시현해 나갔고 1981년을 기준으로 1986년에 사업규모 2배, 자산규모 2.4배, 자본금 3.7배, 수익규모 3.4배의 내실있는 성장을 이룩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협동조합에 있어서도 민주화 차원의 법 개정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88년 12월 수협법 개정을 통해 임명제 수협 조합장제도가 사라지고 조합원이 자신들의 조합장을 직접 선출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변경되면서 수협조직의 민주화와 경영의 자율성이 획기적으로 신장되었다. 1990년 4월 19일 수협에서도 민선 조합장의 손으로 첫 민선회장을 선출해 민주화를 완성하게 된다.



◆수협 중흥기를 맞다(1990년대)=민주화와 자율화의 숙원을 해결한 수협은 자립경영 기반 확립을 위해 1990년 ‘수협대약진’운동을 시작하고 12월 4일에 ‘3조원 자체자금 조성운동’ 추진 결의대회를 열어 당초 계획보다 1년 앞선 1992년 목표를 달성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 수협은 경운동 청사시대를 마감하고 현재의 잠실청사로 이전한다. 때맞춰 수협방송을 개국해 어업인을 위한 교육과 정보전달의 역할도 강화했다. 1998년에는 천안 연수원을 준공해 수협 교육사업의 요람으로 자리잡게 돼 지금까지 매년 회원조합과 중앙회 임직원을 대상으로 교육을 통한 어촌과 수산업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1997년 불어 닥친 외환위기는 수협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1999년 9월 7일 9개 도지회를 폐지하는 등 조직의 축소를 불러왔다. 이후 2000년 독립사업부제를 골자로 하는 수협법개정이 이루어지면서 급기야 2001년 4월 26일 예금보험공사와 MOU를 체결하며 공적자금을 지원받기에 이른다.



◆시련을 기회로 승화(2000년대)=공적자금 투입으로 수협은 큰 시련을 겪게 되지만 변화와 변혁, 개혁을 통해 이를 극복해 나간다.



2001년 ‘뉴스타트180운동’을 시작으로 매년 경영혁신운동을 전개하며 경영성과를 쌓아나갔고 조직의 역량을 경영정상화를 위해 쏟았다. 특히 경제사업 활성화를 위해 노량진수산시장을 인수하는 쾌거를 이룬다. 노량진수산시장은 1988년부터 인수를 추진하여 많은 난관 끝에 2001년 10월 23일 인수에 성공해 지금까지 도심속의 싱싱한 수산물 공급과 휴식처로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가운데 도시와 어촌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2005년부터 기업 및 단체와 어촌계의 자매결연사업을 시작하여 현재 1117건의 자매결연이 체결돼 있는 상태다. 어업인 복지증진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2009년 어업인교육문화복지재단을 설립해 어촌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펼쳐오고 있다.



대어업인 지원 사업은 한층 탄력을 받아 그 동안 위성방송으로 어업인에게 제공하던 정보의 질을 높이고 더욱 다양한 시청층을 확보하기 위해 2010년 어황방송을 개국, 수산정보와 해황정보 등을 적기에 제공해 어업인들이 양질의 정보를 통해 생산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정보환경도 제공했다. 또 2009년에는 소식지 ‘어업in수산’을 발간해 어업인들의 정보비대칭성을 완화하는 데도 노력해 오고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가는 출발점(2010년대)=2010년대 들어 수협은 그 발전을 더욱 가속화한다. 규모뿐만 아니라 성장의 질에 관심을 기울여 어업인과 함께 동반성장하는 기반 구축을 위해 노력해 오고 있다.



특히 어업인 지원에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기 위해 2010년 10월 13일 10년 가까이 분리돼 운영되던 지도와 경제사업을 통합한 것은 물론 현장 어업인의 목소리를 더 가까이에서 듣기 위해 2011년 2월 경남지역사업본부를 개소하기도 했다. 또 국내 최대의 수산물가공처리공장인 인천가공물류센터를 2011년 준공해 수산물 안전성 확보를 더욱 강화했다.



2012년 창립 50주년을 맞은 수협은 ‘하나의 가치, 하나된 힘, 최고의 협동조합’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향후 10년의 발전전략을 함께 제시했다. 이 전략들을 성실히 실천해 가면서 자기혁신과 변혁을 통해 효율성과 전문성을 두루 갖춘 최고의 협동조직으로 거듭날 것을 다짐했다. 아울러 21세기 신 해양시대에 수산업이 중심이 될 수 있도록 어업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국민경제에도 이바지 할 수 있도록 본연의 임무와 기능을 더욱 충실히 수행해 나갈 것이다.



이정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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