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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비밀은 없다

중앙일보 2012.04.02 00:25 종합 28면 지면보기
남윤호
정치부장
브레이크가 망가진 채 내달리는 기관차를 보는 것 같다. 민간인 불법사찰을 둘러싼 정치공방 말이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종착역을 향해 끝까지 폭주할지, 중간에 탈선해 싱겁게 주저앉고 말지 예단하기 어렵다.



 어느 쪽이든 이는 반드시 정리하고 가야 할 문제다. 피하거나 돌아갈 수 없다. 왜 이 모양이냐, 하며 자조할 수만도 없다. 다시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면 어디에선가 전말을 상세히 기록한 백서(白書)라도 만들어야 한다. 다음, 다다음 정권에서 참고하도록 말이다. 그래야 당장은 아프더라도 길게 보면 성장통이 될 수 있다.



 특히 다음 정권을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번 사건을 통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게 한둘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얘기지만 무엇보다 사람을 잘 써야 한다는 점이다. 보통 새 정권이 들어선 뒤 사람을 쓸 땐 로열티(충성심)를 중시하는 경우가 많다. 능력은 빌려 쓸 수 있지만, 충성심은 그럴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자기들만의 이너 서클, 이른바 ‘우리가 남이가’ 그룹이 중추권력을 장악하곤 한다. 이들은 늘 정권 보위부대 역할을 자임한다. 감찰이나 사찰 조직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로 채워진다. 어느 정권에서나 예외가 없는 듯하다.



 하지만 충성심보다 더 중요한 건 일이다. 먼저 일이 스마트하게 굴러가야 한다는 거다. 능력은 모자라는데 충성심이 넘치다 보면 오버하거나 무리수를 두는 법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관련자들이 뭐가 합법이고 뭐가 불법인지도 모르고 감찰과 사찰을 했다 하니 얼마나 아마추어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 충성심 강한 사람들만 모이면 현실과 동떨어진 ‘집단사고’에 빠질 위험도 크다. 능력이란 고형물질과 같다.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는 게 아니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거다. 반면 충성심이란 의외로 유동적이고 휘발성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수틀리거나, 서운하다 싶으면 내부에서 배신의 싹이 트는 것 아니겠나.



 그런 의미에서 무슨 일에든 비밀은 없다고 봐야 한다. 구린 일을 저지른 이상 가리거나 덮는다고 넘어가는 세상이 아니다. 처음부터 언젠가는 드러난다는 전제하에 일을 하는 게 편하다. 비밀이란 관련자들끼리 이해관계가 빈틈없이 꽉 들어맞아야 유지된다.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내부 고발자가 꼭 나오게 돼 있다. 정의감으로 고발할 수도, 수틀린다고 폭로할 수도, 아니면 어설프게 들킨 뒤 고발자로 변신할 수도 있다. 이는 정권 측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지난 정권에서 권력을 운용해본 야당에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이다.



 일단 사건화되면 전혀 다른 차원의 국면이 전개되는 것도 유의점이다. 정권이 하나 둘 산술급수적으로 저지른 비리가 정치쟁점화할 경우 저마다 폭발력을 지닌 곁가지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민간인 불법사찰도 관련자에 대한 엄정한 사법처리로 막을 수 있다고 본다면 오산이다. 이번 사건은 특히 선거일정에 얹혀져 폭발력을 키우고 있다. 사안의 무게와 그것이 몰고 올 정치적 충격의 질량 사이엔 엄청난 비대칭이 있을 수 있다. 정권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현실이다. 누구든 권력을 잡으면 그저 조심하고 긴장하고 빈틈을 보여선 안 된다는 상식적인 말이 그래서 소중한 거다.



 그리고 한번 일이 터져 폭풍이 몰아치면 버티려고 해 봐야 소용이 없다. 시간만 질질 끌며 매를 벌 뿐이다. 대충 입막음 하면 넘어가겠거니 하며 초동대응을 느슨히 하면 반드시 뒤탈이 생긴다. 나중에 아무리 정확한 사실을 공개하며 해명해도 한번 박혀 버린 오해와 불신을 바로잡을 수는 없다. 차라리 즉시 책임자 처벌과 피해자 보상을 병행하면서 대미지 컨트롤(피해 대책)에 들어가는 게 낫다. 중력(重力)을 거스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은 구차해 보인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때도 그랬다. 결국 떠날 걸 뒷모습만 구기지 않았나.



 폭풍에 휩싸인 배는 침몰하지 않으려고 버릴 수 있는 짐부터 바다에 내던진다. 자, 그럼 이명박 정부는 무엇을 내던질 건가. 여당이든 야당이든, 또는 제3세력이든 집권을 노리는 분들은 이번 사건을 귀중한 참고자료로 활용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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