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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불법 사찰, 전 정권 핑계 댈 일 아니다

중앙일보 2012.04.02 00:17 종합 30면 지면보기
총리실 민간인 불법 사찰의 실상이 다량의 문건으로 확인되면서 최대 정치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청와대와 총리실은 “공개된 2619건의 문건 중 80%인 2200여 건이 노무현 정부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문재인 민주통합당 고문은 “무서운 거짓말”이라며 “참여정부는 공직기강 문제에 대해서만 적법한 복무 감찰을 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문건을 처음 공개했던 KBS 새노조는 “문건은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가 일부 문건의 작성 시점이 2006년으로 확인되자 해당 글을 삭제하기도 했다. 이렇듯 문건에 드러난 사안들을 둘러싼 정황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가운데 정치적 이해에 따른 주장이 복잡하게 쏟아지고 있다. 만약 청와대에서 주장하듯 노무현 정부에서도 불법 사찰이 있었다면, 이 역시 명백히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시비로 이번 사건의 본질이 흐려져선 안 된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다. 현 정부 들어 대통령 측근을 정점으로 한 정부 내 비선 조직이 국회의원과 재계 인사, 언론인, 노조 등을 전방위적으로 사찰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특히 2010년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에 대한 불법 사찰이 드러난 뒤 청와대·총리실 인사들이 조직적으로 증거인멸과 은폐에 나선 것은 불법 사찰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 심지어 전직 주무관 한 사람의 입을 막기 위해 1억1000만원의 돈이 오가기도 했다. 검찰이 방대한 사찰 관련 문건을 확보하고도 김종익씨와 남경필 의원 부부, 2건만 기소한 것은 어떤 해명에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청와대 홍보수석은 어제 “지난 정부에서 없던 일이 마치 이 정부에서 벌어졌다고 호도하는 일은 없길 바란다”고 했다. 청와대 설명대로 ‘BH(청와대) 하명사건’이라고 해서 모두 불법은 아니다. 진정이나 제보가 청와대로 접수되면 관련 기관에 보내 처리하는 게 정상적인 절차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법 사찰과 은폐 자체에 대한 진상 공개와 사과가 빠진 청와대의 해명은 전 정권을 핑계로 상황을 모면해 보겠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청와대는 헌법의 기본가치가 무너지고 인권이 침해된 데 대해 책임지는 모습부터 보여야 할 것이다. 전 정권 때의 일을 이유로 현 정부의 잘못을 희석하려 하거나 덮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2012년 현재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대표하고 있는 정부의 자세다.



 청와대가 새누리당의 권재진 법무부 장관 사퇴 요구에 “수사 결과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질 것”이라고 답한 것은 사안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가운데 나온 잘못된 판단이다. 검찰이 어제 대검 차장 브리핑을 통해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성역 없는 수사를 하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을 믿는 이는 많지 않다. 2010년 당시 민정수석이었던 법무부 장관과 수사 라인이 의혹의 핵심으로 떠오른 상황이다. 법무부 장관은 스스로 거취를 표명하는 게 맞다. 국회의 특별검사 법안 추진과 검찰 수사를 동시에 진행하면서 특검 도입 후 검찰 조사 결과를 특검에 넘기는 방안도 생각해봐야 할 때다. 노무현 정권의 불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현 정권의 불법이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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