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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Q회장 "AI때 2주 만에 매상 되돌린 비결은"

중앙일보 2012.03.31 00:00 종합 28면 지면보기
윤홍근 제너시스BBQ 회장이 닭 석상에 기대어 흐뭇하게 웃고 있다. 이 석상은 경기도 이천 ‘치킨대학’ 안에 있다. 기존 가맹점주들은 물론 예비 가맹점주들에게 마케팅 정보 등을 알려주는 교육 장소다. 모친 태몽 때부터 지금까지 한평생 닭과 연을 맺고 사는 윤 회장의 목표는 전 세계 5만 개 매장 확보다. [김성룡 기자]


약 50년 전 전남 순천 풍덕동의 파평(坡平) 윤(尹)씨 집성촌의 종갓집. 어머니는 이따금씩 장손인 아들을 앞에 놓고 태몽 얘기를 했다. “하늘에서 봉황이 춤추면서 내려와 내 품에 안겼단다. 그리고 널 낳았지.”

[돈과 경제] 파워 중견기업인 … 윤홍근 제너시스BBQ 회장
어머니가 꿨다는 봉황 태몽, 실은 닭이 아니었나 싶어요



 하도 많이 들어 나이가 50대 후반에 접어든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얘기였다. 그러나 요즘 그는 태몽이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꿈에 나타난 게 사실은 봉황이 아니라 닭이었나 봐요.” 그는 치킨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는 윤홍근(57) 제너시스BBQ 회장이다.





종손으로서 받은 가르침



윤 회장은 1955년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동네 평야의 약 30%가 우리 집 것이었다”고 했다. 머슴만 다섯이었다. 식구는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대가족이었다. 그러나 남자 중엔 그가 가장 어른(?)이었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타계했고, 부친은 여수에 나가 사업을 했다. 증조모·조모와 모친 손에서 자란 그는 그 속에서 ‘베푸는 리더십’을 배웠다고 했다.



 “증조할머니께서 마을의 최고 어르신이었죠. 무슨 일이 생기면 마을 사람들이 증조할머니께 왔습니다. 그러면 나서서 이것저것 직접 해결을 하셨지요. 베푸는 데는 한 번도 마다하신 적이 없고요. 먹을 게 떨어졌다면 곡식을 내주고, 자식 학비 때문에 사정하러 왔다면 돈을 내주고….”



 어머니로부터도 ‘베푸는 것’의 중요성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너의 외할아버지께서는 해방 전에 경찰서장을 지내셨지. 해방 후에도 경찰 일을 하셨고. 그 때문에 죽을 고비를 세 번 넘기셨단다. 해방 직후에, 여순반란사건(여수·순천사건, 1948년 10월) 때, 그리고 6·25 와중에. 모르는 이들이 ‘일제의 앞잡이’라면서 처단하려 할 때 막아준 사람들이 있었어. ‘경찰이긴 하지만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이들 뒤를 돌봐주신 분이다’라면서. 그래서 놓여나곤 했어. 다 평소에 베풀고 산 덕이란다. 너도 그렇게 살거라.”



 종가인 윤 회장의 집에는 1년에 24차례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 제사만 12차례였다. 거기에 설날·대보름·삼짇날·한식 같은 주요 절기 때마다 마을 잔치를 했다. 제사건, 잔치건 늘 돼지와 닭을 잡았다. 돼지는 늘 손님인 마을 사람들 몫이었다. 좋은 건 남에게 먼저 내놓는다는 게 집안의 불문율이었다.



 닭은 가족들에게 돌아왔다. 대부분 백숙요리였던 것으로 윤 회장은 기억했다. 증조할머니와 할머니, 어머니는 백숙에 손을 대는 둥 마는 둥, 대부분을 종손인 윤 회장에게 넘겼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닭과 인연을 맺었다.



천도리 군단장



고교생 시절에 가세가 기울었다. 부친이 작고하면서 운영하던 사업체가 무너져 논밭과 집을 팔아 빚을 갚아야 했다. 장학금이 필요해 지방대(조선대 무역학과)에 진학해서는 수석 졸업을 했다. 군대는 그때 처음 생긴 학사장교를 택했다. 동생들 학비에 보탤 월급을 받으려는 게 목적이었다.



 훈련을 마친 82년 초, 학사장교 상당수가 강원도 인제군 원통면의 부대에 배치됐다. 첫날이었다. 장교 대기소가 어딘지 허름했다. 사병 조교가 와서는 말했다. “아니 장교님들께서 왜 이곳에…. 여긴 신병 대기소입니다. 장교님들 대기소는 따로 있습니다.”



 기존 장교들이 새로 생긴 ‘1기’ 학사장교들에게 왕따를 놓은 것이었다. 분위기가 술렁였다. 그때 윤 회장이 나섰다. “어려서부터 마을에 무슨 일이 있으면 증조할머니께서 몸소 해결하시는 것을 봐온 터라, 그냥 제가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직 사령을 찾아갔다. 중령이었다. “어떻게 장교들을 여기에 둘 수 있느냐”고 따졌다. 새파란 소위한테 항변을 들은 중령이 가만있을 리 없다. “빳다를 치겠다”며 노발대발했다. 윤 회장은 “같은 장교일 뿐 내 직속 상관도 아니지 않으냐”며 못 맞겠다고 버텼다. 당당하게 나가자 오히려 발끈했던 당직 사령이 수그러들었고, 사태가 해결됐다.



 첫날 이런 일이 있은 뒤 윤 회장은 자연스레 동기들의 리더가 됐다. 공식적으로 원통면 일대에 배치된 동기모임 회장이 됐다. 회장으로서 동기들이 주말에 외박 나가 술 마시다가 외상을 지고서 못 갚으면 자기 돈으로 메워줬다.



 “외상을 놔두자니 장사하시는 분들에게 피해가 가고, 동기도 욕을 먹고. 그냥 제 돈으로 해결했죠. 집안에서 마을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척척 내어주시는 걸 보고 자라서 그랬나 봅니다. 거기에 가끔씩 제가 술도 사고 하다 보니 동생들 학비를 보태주지 못하게 돼버렸어요.”



 대신 동기와 후배, 그리고 상인들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또 하나 얻은 것이 ‘천도리 군단장’이란 별명이다. 천도리는 윤 회장이 복무한 부대가 있던 마을. 한번은 ‘주말에 모이자’고 연락을 했더니 동기·후배 250여 명이 나온 적이 있다. 군단장이 아니고서야 이만한 숫자의 장교를 모을 수 없다고 해서 ‘천도리 군단장’이란 별명이 붙었다.



 윤 회장과 동기들이 전역하는 날, 천도리에서는 환송연이 열렸다. 떼어먹은 외상이 없었던 데 대해 상인들이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었다. 잔치는 사흘 밤낮으로 계속됐다.



무작정 취업준비에 나서고



동기들과 전역을 한 게 9월. 일자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주요 기업들은 이미 석 달 전에 공채를 마친 상태였다. 다음 번까지는 적어도 석 달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자신도 그랬고, 취직이 급하다는 다른 동기도 있었다. 도합 430여 명의 일자리가 필요했다.



 다시 나섰다. 몇몇 동기와 함께 ‘학사장교 1회’ 취직 작전을 시작했다. 430여 명 모두에게서 이력서를 5부씩 받았다. 그러곤 무작정 삼성·현대·대우·LG·롯데 그룹의 인사담당 임원을 만나자고 했다. 통할 리가 없었다. 몇몇 동기들조차 “어림도 없는 일은 벌이지 말자”고 말렸다. 그래도 덤벼들었다. 삼성부터 무작정 찾아가 인사담당 부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하고 떼도 썼다.



 그러기를 몇 차례. 어찌된 일인지 삼성의 간부가 만나겠다고 했다. 이력서를 보고는 “좋은 인재들이 많다”고 했다. 그리곤 덧붙여 물었다. “합격하면 정말 오는 겁니까.”



 “앞뒤 생각할 게 있겠습니까. 무조건 ‘다들 간다’고 했죠.”



 그 다음은 술술 풀렸다. 삼성에서 받아들였다고 하니 다른 그룹도 전부 만나겠다고 했다. 430여 명이 전부 취직에 성공했다. 복수합격자도 많았다. 윤 회장은 “그때부터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신조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윤 회장 자신은 롯데에 취직했다. 그리고 곧 미원그룹으로 옮겨 미원이 인수한 닭고기 업체 ‘마니커’ 사업을 맡게 됐다. 다시 닭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닥치고 준비



미원에서 일할 때 시장의 가능성을 알고 나서 검토에 검토를 거듭한 뒤 회사를 나와 프랜차이즈 사업을 차린 게 95년이었다. 처음 회사를 낼 때 서울 광장동에 건물 2개 층을 얻었다. 그중 한 층을 가맹점주 교육장과 실습실로 꾸몄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일이었다.



 “모든 사업은 준비가 철저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맹점주를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창업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준비가 만사다’라는 것은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이다. 미원 신입사원 시절, 학사장교 동기들과 ‘일맥상사’라는 기념품 회사를 차린 적이 있다. 일종의 투잡이었다. ‘학사장교들 기념 반지와 유니폼 수요가 있고, 또 동기들이 대기업에 들어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에 차린 업체였다.



 곧 망했다. 그 바람에 윤 회장은 집까지 처분해야 했다. 준비 없이 사업에 뛰어드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던 경험이었다.



 준비를 철저히 해서일까. 사업은 착착 뻗어 나갔다. 4년 만에 전국에 1000개 점포를 두게 됐다. 외환위기를 잘 넘겼고, 2000년엔 지금 사옥으로 쓰는, 서울 문정동의 9층짜리 빌딩을 샀다. 가맹점주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경기도 이천에 ‘치킨대학’을 세우기까지 했다.



 2003년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다. 조류인플루엔자(AI)가 창궐했다. BBQ치킨을 비롯해 거의 모든 치킨점이 문을 닫을 지경이 됐다. 익힌 닭고기는 먹어도 안전하다고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었다. 머리를 짜내고 또 짜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닭고기 먹고 AI에 걸리면 20억원을 보상해 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실행에 옮겼다. 2주 만에 거짓말처럼 치킨점 매상은 제자리를 찾았다.



 “세상에 막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저 사람이 길을 찾지 못하고 좌절하는 것뿐. 찾고 찾고 또 찾으면 해답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그가 해외사업을 시작한 시기 역시 2003년이었다. 중국 상하이에 점포를 낸 것이다. “계속 성장하려면 해외 진출이 필수”라고 창업 때부터 생각해온 터였다.



 지금은 국내 3730여 개, 해외 56개국에 350개 가맹점을 거느리고 있다. 지난해 매출이 9700억원으로, ‘중견기업의 꿈’인 1조원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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