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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대통령이 불법사찰 해명하고 사과해야

중앙일보 2012.03.31 00:00 종합 42면 지면보기
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과 관련된 다량의 문건이 추가 폭로되면서 사건이 보다 심각한 국면으로 흘러가고 있다. 새로 나온 문건은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조사관이 가지고 있던 저장장치(USB)에 들어 있던 2619건의 사찰 관련 자료다. 파업 중인 KBS 새 노조가 ‘리셋 KBS 9시 뉴스’(노조에서 만든 팟캐스트)를 통해 공개했다.



 이번 문건 폭로로 불법사찰 사건은 지금까지와 다른 차원으로 비화되고 있다. 문건을 보면 불법사찰이 상상 이상으로 광범하게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 드러난 것은 ‘하명사건 처리부’라는 문서의 일부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문제가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 관련 단일 사건이었다면, 이번에 문건을 통해 확인된 실상은 정부기관에 의한 조직적·체계적 사찰 사건이다. ‘사찰의 범위’라는 양(量)적인 문제보다 문건에서 드러난 ‘불법 행태의 심각성’이라는 질(質)적인 문제가 더 치명적이다.



첫 번째로 지적해야 할 대목은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업무 범위를 벗어난 사찰의 불법성이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공직자의 복무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당연히 사찰 대상은 공직자로 한정돼야 한다. 그런데 문건에 따르면 공직윤리지원관실은 공무원과 공기업 임원뿐 아니라 민간인과 민간기업, 특히 언론기관과 언론인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사찰 활동을 벌였다.



 둘째로 사찰의 내용이 매우 정치적이란 점도 문제다. 업무와 관련된 공무원의 비리나 무능을 캐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현 정권에 얼마나 충성을 다하느냐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촛불시위에 연루된 노조나 언론인, 기업인, 정부에 비판적인 정치인에 대한 사찰 역시 정치적 압력을 위한 수단으로 의심된다. 실제로 사찰 보고서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사람은 자리에서 물러났고, 호평을 받은 사람은 승진했다. 정부 차원의 기강 확립이 아니라 정권 차원의 불법사찰인 셈이다.



 셋째 사찰의 수단 역시 불법적이다. 아무리 공무원이라고 하더라도 사생활은 보호돼야 한다. 그런데 한 사정기관 고위 공직자의 경우 불륜 관계인 여성과 만나는 과정이 분 단위로 샅샅이 보고됐다. 대화 내용까지 옮겨진 것으로 미뤄 미행과 도청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심각한 인권침해가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심각한 불법행위를 덮으려는 축소·은폐 의혹이다. 지금까지 장진수 전 주무관이 폭로해온 내용에 대해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유일하게 ‘몸통’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문건을 보면 이번 사건은 일개 비서관 차원이 아니라 청와대에서 검찰까지 광범한 정부기관이 연루됐음을 알 수 있다. 보고서가 민정수석과 대통령실장을 통해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검찰의 경우 이번에 폭로된 문건을 지난 2010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2건만 수사하고 덮었다. 그래서 ‘무관하다’는 청와대의 입장이나 ‘철저히 재수사하겠다’는 검찰의 다짐이 전혀 국민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에서 주장하듯 장 전 주무관의 단계적인 폭로가 정치적으로 기획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무관하게 사찰의 불법성은 규명돼야 한다. 이제 대통령이 나서 해명해야 한다. 진상을 밝히고 사과하고, 엄격한 재수사를 위해 사건 당시 민정수석이었던 권재진 법무장관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 더 이상 외면과 무시는 국민적 의혹만 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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