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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 않는 임신에 약국찾은 여고생, 말없이…

중앙일보 2012.03.28 03:00 종합 1면 지면보기
정부가 사후(응급) 피임약 판매방식을 두고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지금처럼 의사 처방이 있어야만 약국에서 살 수 있는 전문약으로 두느냐, 아니면 처방 없이 구입 가능한 일반약으로 바꾸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다. 정부는 일반약으로 바꾸는 쪽에 관심을 더 두고 있다. 하지만 생명 경시라는 종교계의 비판에다 남용·부작용을 우려하는 의료계 반발 때문에 선뜻 방침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가 29일 공청회에서 이 문제를 다룰 예정이어서 찬반 논란이 폭발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사후피임약 구입 쉽게 … 처방 없이 판매 검토, 종교·여성계 논란 클 듯
내일 산부인과의사회 공청회

 지난 3일(토요일) 오후 5시, 서울 영등포구의 한 약국에 고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쭈뼛쭈뼛 들어섰다. 그는 “사후피임약을 달라”고 말했다. 박모(58) 약사가 “의사 처방전이 없으면 약을 줄 수 없다”며 “(성관계를 한 지) 얼마나 됐느냐”고 묻자 그 학생은 말없이 돌아섰다. 박 약사는 “한 달에 파는 사후피임약 중 60%를 중·고생이 사간다”며 “ 처방전이 없어 그냥 돌려보낼 때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사후 피임약은 성관계 뒤 72시간 내에 복용해야 효과가 있다.



서울 신촌·명동 등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지역은 휴일이나 야간에 이런 일들이 끊이지 않는다. 계획 없이 성관계를 가졌다가 임신이 걱정돼 약국을 찾는다. 하지만 처방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대부분 모르는 데다 병원이 문을 닫은 때라 처방전을 받기도 어려워 낭패를 보기 일쑤다.



 정부가 사후피임약을 일반약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아직 방향을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무게중심은 일반약으로 바꾸는 쪽에 있다. 보건복지부 고위 관계자는 “일반약으로 전환해도 안전성에 크게 문제가 없다고 보지만 반론도 있어 함께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복지부는 사후피임약의 구매 편의를 높이면 원치 않는 임신을 막아 낙태를 줄일 수 있다고 본다. 매년 2000~3000명 발생하는 10대 미혼모를 줄이는 효과도 기대한다. 미국·캐나다·프랑스 등 40여 개국은 의사 처방 없이 약국에서 사후피임약을 판다. 경실련 등 시민단체와 여성계는 일반약 전환을 촉구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김두나씨는 “성폭력 등에 대처하고 여성의 권리를 지키려면 약을 쉽게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에 천주교 생명윤리위원회 송열섭 총무는 “응급피임약은 생명이 가는 길을 방해하는 폭력적인 약”이라고 주장했다.





◆사후(응급) 피임약=성관계 후 복용하면 약품 내 호르몬이 수정란의 자궁 착상을 막아 임신을 방지해준다. 하지만 한 번 복용할 때 사전 피임약의 10배에 달하는 호르몬이 한꺼번에 가해져 몸에 무리를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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