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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16> 대만(臺灣) 수도 타이베이(臺北)

중앙일보 2012.03.28 00:00 경제 13면 지면보기


신경진

진시황 불로초 구하러 왔다 눌러앉은 한족, 대만 이주민 첫 기록

중국연구소 연구원




지금부터 20년 전인 1992년 8월 24일 한국인들에게 ‘중국’의 의미가 ‘자유중국(중화민국)’에서 ‘중공(중국공산당)’으로 바뀌었다. 한국정부가 대만(臺灣)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상옥 외교장관은 수교 1주일 전인 8월18일과 3일전인 21일 두 차례 진수치(金樹基) 주한 대만 대사에게 공식 통보하면서 각별했던 공식 관계가 끝났다. 다음달부터 서울 김포공항과 타이베이(臺北) 시내 쑹산(嵩山)공항 간 하늘길이 열린다. 다시 가까워진 대만과 타이베이로 떠나보자.





‘아름다운 섬’ 대만의 유래



2008년 초 대만 ‘중정(中正, 국민당 장제스 총통의 호)기념당’의 내부 모습. 당시 민진당 천수이볜 총통은 ‘대만민주기념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대규모 ‘연(鳶) 전시회’를 열었다. [중앙포토]


대만이란 이름의 유래에는 세 가지 설이 있다. 먼저 1624년 네덜란드인들이 대만을 점령한 뒤 바닷물이 육지로 굽어 들어온 만(灣)에 누대(臺)를 수축한 데서 시작됐다는 설이다. 둘째, 대만(大灣)에서 시작됐다는 설이다. 지금의 타이난(臺南)시 안핑(安平)의 지형은 본디 만이었다. 안핑은 1822년 발생한 대형 홍수로 만이 토사로 메워져 육지로 변했다. 셋째, 대원(臺員)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명(明) 중엽 안핑 부근에는 대와만(臺窩灣)족으로 불리는 토착민들이 거주했다. 이들 종족의 이름에서 대만이 유래했다는 설이다.



대만의 영어 이름은 포모사(Formosa)다. 포르투갈인들이 ‘아름다운 섬’이라 붙인 데서 유래한다. 대만 사람들이 지금도 대만을 미려도(美麗島)라 부르는 이유다.



1624년부터 38년 간 네덜란드 식민지





대만 인구 2300만 명은 토착 원주민과 여러 차례 대륙에서 이주해 온 한족(漢族)으로 나뉜다. 고산족(高山族)으로 불리는 원주민은 동남아계의 언어와 습성을 갖고 있다. 애초에는 평지에 살았다. 한족들의 이주로 평원에서 산지로 쫓겨 들어갔다. 가장 이른 통계는 20만 명 정도로 기록하고 있다. 청(淸)과 일제의 토벌로 1940년대 12만 명까지 줄었다. 현재는 인구의 2.1%인 50만 명 정도를 차지한다.



대만에 한족이 이주한 최초의 기록은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보인다. 진시황의 명령을 받은 서복(徐福)이 봉래산 불로초를 구하는 데 실패하자 사형당할까 두려워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한 곳이 이주(夷洲) 및 전주(?洲)였다는 기록이다. 이주, 전주는 대만의 옛 이름이다. 이후 삼국시대 오(吳)나라 손권(孫權)과 수양제(隋煬帝)인 양광(楊廣)이 대만에 대군을 파견했다. 군인과 함께 한족 이주민들이 함께 건너가 정착했다.



청나라 강희제, 수군 2만 명 동원 공략



17세기 대만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경영하는 식민지였다. 1620년 푸젠(福建)에 심각한 가뭄이 들었다. 백성의 3분의 1이 굶어죽었다. 빈농들이 바다를 건너 대만의 농지를 개간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이들을 보호했다. 1624년부터 38년간 지속된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는 1661년 한족 출신 해적 집단의 우두머리였던 정성공(鄭成功)의 격퇴로 마무리됐다. 명의 잔존세력들과 함께 청(淸)에 항명하던 정씨 정권은 이미 정착해 있던 10만 명의 한족과 자신을 따라 건너온 5만여 명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대만을 개간했다. 1683년 청 강희제는 장수 시랑(施琅)에게 수군 2만 명, 전함 200척을 주며 대만 공략을 명령했다. 정씨 정권은 1683년 청조의 무력과 자중지란에 빠져 결국 투항했다.



청조는 대만을 푸젠성에 포함시켜 1부(府) 3현(縣)을 설치했다. 세금부담을 본토보다 덜어주고, 관리 선발에 특혜를 주는 ‘특구’ 정책을 시행했다. 현지민 회유책이었다. 현대 대만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본성인(本省人) 대부분이 청대에 건너간 이유다. 본성인은 푸젠 출신이 70%, 멀리 중원에서 남하한 이주민 집단인 객가(客家) 출신이 15%로 나뉜다. 객가는 부락민끼리 무기를 동원해 다투는 계투(械鬪) 습속까지 대만으로 가져갔다. “치세에는 푸젠 사람들이 광둥 사람을 깔보고, 난세에는 광둥 사람이 푸젠 사람을 경멸한다(治時?欺?, 亂時栒侮?)”는 말이 대만에 퍼졌다. 크고 작은 계투가 발생하지 않는 해가 없었다.



1894년 청일전쟁 패배로 대만은 이후 51년 동안 일본 식민지로 전락했다. 1945년 찾아온 광복은 혼란과 갈등을 함께 가져왔다. 1947년2월 27일 대륙에서 갓 건너온 담배 전매국 직원이 길가 좌판 노파를 단속하면서 심하게 구타하는 사건이 타이베이에서 발생했다. 주위 군중들은 단속원을 둘러싸고 질타했다. 위기를 느낀 단속원이 발포해 군중 한 명이 사망했다. 광복과 함께 건너온 저급한 본토 관리들에게 품었던 본성인의 불만이 폭발했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본성인 진압에 나섰다. 본성인 1만9000여 명이 희생됐다. 허우샤오셴(侯孝賢) 감독, 량차오웨이(梁朝偉) 주연의 영화 ‘비정성시(悲情城市)’의 배경이 된 2·28사건이다. 이 사건은 일본 식민지 기간 성장했던 대만 엘리트층을 일소시켰다. 현재 대만 인구의 13%를 차지하는 1949년 대륙에서 패퇴한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권을 따라 건너온 외성인(外省人) 통치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던 셈이다. 외성인에 대한 본성인의 반감이 생겨난 뿌리다.



자본금 5만냥으로 세운 도시 타이베이



1884년 청불전쟁에서 프랑스군의 대만 공격을 겪은 청조는 1887년 대만을 독립된 성(省)으로 승격시키고 근대화 정책을 시행했다. 초대 순무 유명전(劉銘傳)은 상하이(上海), 쑤저우(蘇州), 닝보(寧波) 출신의 부유한 상인들에게 요청해 ‘흥시공사(興市公司)’라는 자본금 5만 냥의 회사를 설립했다. 이 자금을 기반으로 타이베이에 견고한 성을 쌓고, 상점을 열고, 도로를 깔고, 전기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장쑤(江蘇)·저장(浙江)성 등 연안 지역의 부유한 도시민이 타이베이로 이주해 왔다. 대만의 정치·경제 중심지 타이베이는 이처럼 19세기 말에 세워진 비교적 신생도시다. 청을 이은 일본도 타이베이에 총독부를 세워 식민지배의 본부로 삼았다.



대만은 공포정치의 역사가 길었다. 일제 식민지배 51년, 국민당 계엄통치가 38년간 이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과거의 역사다. 1987년 7월 14일 1949년 5월부터 시작된 계엄령이 해제됐다. 그해 11월에는 대륙 방문 자유화 조치도 발표됐다. 지금은 매주 530여 편의 항공편이 양안(兩岸, 중국 본토와 대만) 사이를 오간다. 올 1월 재선에 성공한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정권은 중국과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해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2010년 10.8%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2011년 대만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1592달러에 이른다. 중국은 5449달러다.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성공한 중국의 모습을 보려면 타이베이로 가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국민당 선택한 철학자 후스, 화가 장다첸 말년 보내



타이베이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은

대만의 상징인 타이베이 101 빌딩이 새해를 맞아 현란한 불꽃쇼를 펼치고 있다.(사진 위) 타이베이 북부 와이솽시 산중턱에 위치한 국립고궁박물원(사진 아래). 전시공간을 현재의 5배로 늘리는 ‘대고궁(大故宮) 프로젝트’가 추진 중이다.
공산당 대신 국민당을 선택한 명인(名人)들은 타이베이에서 말년을 보냈다. 자유주의를 신봉한 철학자 후스(胡適)의 최종 도착지는 타이베이였다. 그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미국인 패트릭 헨리의 1775년 연설을 중국의 고전에서 찾아냈다. 송(宋)대 범중엄(范仲淹)의 작품 ‘신령한 까마귀를 노래함(靈烏賦)’에 “울다 죽을지언정 침묵하며 살지 않겠다(寧鳴而死 不默而生)”는 구절을 찾아 타이베이에서 간행되던 잡지 『자유중국(自由中國)』에 동명의 제목으로 게재했다. 1948년 베이징을 떠나는 마지막 비행기로 빠져나온 후스는 미국에 머물다 1958년 총통 직속의 최고 학술연구기관인 중앙연구원장에 임명됐다. 62년 죽을 때까지 중앙연구원이 위치한 난강(南港)에 머물렀다. 대학생까지 교복으로 군복을 입어야만 했던 암울한 시절 자유주의자 후스의 존재는 그 자체가 대만인들에게 하나의 숨통이었다.



화가 장다첸(張大千)도 타이베이에서 말년을 보냈다. 현재 장다첸기념관으로 조성된 ‘마야정사(摩耶精舍)’가 바로 그곳. 지난해 경매 총액에서 피카소를 능가한 현대 중국 화단의 대가인 장다첸은 평생 다섯 곳에 손수 집을 지었다. 쓰촨(四川)의 ‘매도(梅都)’, 브라질의 ‘팔덕원(八德園)’, 미국의 ‘가이거(可以居)’와 ‘환필암(環畢?)’, 마지막이 타이베이 와이솽시(外雙溪)의 ‘마야정사’다. 마야는 석가모니 어머니의 이름이다. 마야부인의 배 속에 삼 천 개의 ‘대천(大千)세계’가 있다는 뜻이다. 현관문을 들어서면 분재매화가 손님을 맞는다. 그 옆 선생의 화실을 지나면 ㅁ자형 정원이 나온다. 진귀한 화초, 인공 연못의 비단잉어, 대나무와 바위가 조화를 이룬다. 안뜰을 지나면 구름다리가 매화언덕(梅丘)으로 안내한다. 장다첸은 이곳에 영면하고 있다.



●국립고궁박물원=중국에는 고궁이 두 개다. 베이징 자금성과 타이베이의 고궁박물원이다. “타이베이에는 유물은 있지만 고궁이 없고(有寶無館), 베이징에는 고궁은 있어도 유물이 없다(有館無寶)”는 말이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청동기로부터 당·송대의 진귀한 시서화(詩書畵), 값을 매길 수 없는 황제의 도자기와 옥기를 비롯해 희귀 고적본까지 총 68만여 점에 이르는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 중국 황실의 컬렉션이 관람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타이베이 101빌딩=세계 초고층 빌딩 역사에서 500m를 처음 돌파한 빌딩이다. 완공된 2004년 12월 31일부터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가 완공된 2010년 1월 4일까지 세계 최고층 빌딩이었다. 8자를 좋아하는 중국인답게 여덟 층 묶음을 여덟 개로 쌓은 모습이다. 겹겹이 핀 연꽃을 닮았다. 타이베이 101은 거대한 전광판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발견 100주년인 2005년 4월19일에는 상대성 공식인 ‘E=mc²’를, 2006년과 2007년 밸런타인 데이에는 ‘하트(♥)’를, 중화민국 건국 100주년인 2011년 10월 8일부터 13일까지는 ‘100’을 빌딩 외벽의 야간 조명으로 밝혀 화제를 모았다. 해마다 12월 31일 자정을 전후해 188초에서 208초 동안 건물 외벽에서 2만 발에서 3만 발의 폭죽을 터뜨리는 장관을 연출한다.



●중정기념당=남색 기와와 흰 벽돌이 인상적인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도 타이베이의 필수 방문 코스다. 장제스를 기념하기 위해 역대 제왕의 황릉 규모로 지은 대형 기념관이다.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이 집권한 2007년부터 2년간 타이완민주화기념관으로 이름이 바뀌는 수모도 당했다. 마잉주가 다시 복원시켰다. 각종 전시회 장소로 애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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