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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칼럼] 전문가도 모르는 고령자 표준

중앙일보 2012.03.28 00:00 경제 12면 지면보기
이성일
성균관대 시스템경영공학과 교수
얼마 전 국내 대표기업의 상품 개발자 3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고령자와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설계, 즉 ‘유니버설 디자인’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물었다. 조사에 응한 개발자는 기업의 핵심 엔지니어·상품기획자·디자이너는 물론 유명 국책연구소의 연구원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개발하는 제품을 고령자와 장애인이 사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대부분 고령자·장애인을 고려한 제품을 설계·생산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고, 유니버설 디자인의 개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급속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국내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결과다.



 문제는 좀 더 깊은 내용을 묻는 문항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유니버설 디자인을 활용한 구체적인 설계방법을 아느냐는 질문에 모른다는 대답이 현저히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제품 개발 시 유니버설 디자인을 반영하는 경우는 10%도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KS표준으로 채택한 ‘고령자와 장애인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한 규격 개발자 지침’인 ‘ISO/IEC Guide 71’에 대해 알고 있는 비율은 1%밖에 되지 않았다. 이보다 더 상세한 내용을 담은 기술보고서를 아는 비율은 당연히 1% 미만이었다.



 이를 해석하면 99%의 개발자가 고령자·장애인을 생각하긴 하지만, 이들이 제품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다. 과거 많은 설문조사 연구를 했지만 하나의 설문 문항에 대한 대답이 99%와 1%로 나뉜 적은 처음이어서 당혹스러웠다.



 최근 우리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고령화 사회의 그늘을 많이 접하게 된다. 한국의 인구 구성은 고령 인구의 비율이 젊은 사람이 차지하는 비율보다 훨씬 높아지는 ‘역피라미드’형이 되고 있다. 이 때문인지 정부와 정치권은 입만 열면 복지를 강조하고 있다. 이미 한국은 2006년 유엔의 장애인 권리장전 선포 이후 각종 장애인차별금지법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각종 제품과 서비스에 접근성을 높이는 것을 의무화하는 법률이 속속 제정되고 있다. 국제적으로도 ISO·IEC·ITU 등 3대 국제표준기관에서는 고령자·장애인의 접근성을 향후 모든 국제표준 개발 시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슈로 선정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유능한 개발자의 고령자·장애인의 접근성에 대한 인식과 지식 수준은 너무나도 열악한 것 같다. 고령자·장애인이 자사 제품을 소비하지 않는 한 이를 반영할 여유도 없고 관심도 없는 분위기가 됐다. 기업의 현재 이익과 직결되는 표준이 아니면, 향후 그 중요성이 아무리 커도 관심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국가 표준을 담당하는 기술표준원도 이토록 중요한 표준지침의 보급과 확산, 교육에 너무나 무성의한 느낌이다. 개발자조차 고령화·장애인 표준적용을 늘리기 위한 대안으로 정부의 정책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꼽을 정도다.



 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표준을 거의 교육하지 않는다. 개발자가 고령화·장애인 표준에 대한 체계적인 방법론을 모른다면 제품 설계에 반영할 수 없다. 매번 외부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해야 하거나 비용을 들여 해결해야 한다.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화두가 된 요즘 쓸데없는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이제라도 개발자를 길러내는 학교, 개발자가 활동하는 기업에서 고령자와 장애인의 제품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표준을 교육해야 한다.



이성일 성균관대 시스템경영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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