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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62) 류샤오치는 몰랐다

중앙일보 2012.03.26 00:42


▲1959년 1월 군사훈련을 참관하는 국가주석 류샤오치(劉少奇?앞줄 왼쪽)와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 [사진 김명호]

류샤오치는 몰랐다, 죽은 레이펑이 자기 목 겨눌 줄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은 체면에 금이 갔다. 붉은 깃발 난무하던 정치운동도 동력을 상실했다. 대신 류샤오치와 추종자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지지를 등에 업은 중공 중앙당은 경제문제에 주력했다. 몇 년이 지나자 변화가 눈에 보였다. 3년 만에 원유 생산량이 650만t을 초과했다. 자급자족에 충분한 양이었다. 농업용 전기 소모량도 대약진운동이 시작되던 1958년에 비해 10배 이상 증가했다.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하고, 초보적이지만 전국적인 의료·보건·위생망 구축도 시도했다. 농산물 수확도 44% 이상 증가했다. 국력 증강과 생활 수준 향상은 시간문제였다.



마오쩌둥의 생각은 류샤오치와 달랐다. 56년 헝가리사태가 발생했을 때 “동유럽 국가들의 기본 문제는 계급투쟁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을 통해 무산계급을 훈련시켜야 한다. 아군과 적군, 옳은 것과 그른 것, 유심론과 유물론을 구분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고 공언했던 것처럼 정권의 안정은 물론이고 인간과 사회를 개조하려면 계급투쟁이 유일했다. 먹고사는 문제는 언제고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시행착오를 통감한 마오쩌둥은 자신의 계획을 잠시 중단했다. “무산계급과 자산계급 간의 모순, 사회주의로 향하는 길과 자본주의가 가는 길에 발생하는 모순, 이것이 우리가 당면한 가장 큰 모순이다. 베이징 공기가 형편없다”며 수도를 떠났다. 항저우(杭州)와 쑤저우(蘇州)에 머무르며 계급투쟁 이론을 진일보시킨 대규모 정치운동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투쟁의욕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무슨 일이건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군대를 완전 장악하고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후 개인숭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두 팔을 걷어붙였다. 총리 저우언라이를 통해 군구(軍區)를 재조정하고 군구사령관의 지휘권을 박탈했다. 국방부장이나 원수(元帥)들은 하루아침에 행정업무나 보는 장식물로 전락했다. 마오가 주재하는 중앙군사위원회가 지휘관에서 사병에 이르기까지 전군의 동향과 지휘권을 장악해 버렸다.



62년 9월에 열린 전당대회에서 마오쩌둥은 계급투쟁을 강도 높게 강조했다. “해마다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매달 강조하고 매일 강조해야 한다. 단 하루도 계급투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62년 8월 15일 22세의 해방군 전사 레이펑(雷鋒·뢰봉)이 군대에서 흔히 발생하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7개월 후 마오쩌둥은 레이펑이 남긴 일기를 보라며 “레이펑 동지를 배우자”는 운동을 벌였다. 일기에 “녹슬지 않는 못이 되어 조국을 위해 봉사하겠다. 조국의 번영 없이 개인의 행복은 없다”는 내용이 있었지만 더 중요한 건 “생전에 칭찬받던 모든 선행이 마오 주석의 훈도 때문”이라는 대목이었다. 그의 일기에는 “마오에 대한 충성이 당과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구절이 끝없이 반복됐다.



대장·원수 할 것 없이 2년7개월 남짓 군대 밥을 먹은 사병의 무덤에 화환을 바치고 머리를 조아렸다. 전국의 청소년들은 레이펑 찬양에 날을 지새웠다. 레이펑 찬양은 마오쩌둥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졌다. 마오에 대한 충성은 당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의미했다. 비난하는 사람은 당과 국가의 반역자였다.

류샤오치도 레이펑을 찬미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개인숭배의 광풍이 얼마 후 자신의 목을 겨누는 무기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실권을 잃은 마오의 푸념이겠거니 했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덩샤오핑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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